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오랜만에 만난 동료 교수가 다가와서 대각선으로 앉았다. 나보다 아래 연배인 그가 내게 “아직도 수술을 하십니까?”라고 물었다.
예기치 못한 질문에 순간 당황하며 지난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전공의 수련을 받던 시절, 그러니까 약 30년 전에 강남이 화려해지고 소득이 올라 윤택한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을 때 유행했던 ‘아직도 시리즈 질문’이 있었다. ‘아직도 강북에 사십니까?(강남으로 이사 안 했나?), 아직도 테니스 치십니까?(골프 안 치나?), 아직도 그 여자와 사십니까?(젊은 여자와 재혼 안 했나?)’가 그 시리즈였다.
내가 “어제는 광대뼈 골절 3개, 코뼈 골절 두개로, 수술 5개 했는데요” 라고 답하자, 그는 “교수님 정년이 몇 년 남지 않으셨지요? 저희 배울 때는 외과교수님들이 50대 후반이 되면 수술 거의 안 하고 쉬지 않았습니까?”라고 되물었다.
내가 대답했다. “옛날 어느 큰 절에 어른이 되시는 스님이 계셨어요. 그 스님은 연세가 높아져도 밭에 나와서 일하셨지요. 노인이 땀 흘려 일하는 게 안쓰러워서 어느 날 제자들이 그 스님이 사용하는 쟁기와 호미 등의 농기구를 숨겼어요. 그랬더니 그 노스님은 그날 밥을 전혀 드시지 않았어요. 할 수 없이 제자들은 숨겼던 농기구를 다시 내놓았답니다. 그 스님처럼 저도 밥값은 하고 살아야지요”
내가 말한 그 스님은 평생 밭을 갈고 참선하며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겠다(一日不作 一日不食)”는 말로 유명한 백장선사(749-814)이다.
전공의로부터 문자가 왔다. ‘내일 수술은 코뼈 수술로 비개방교정술을 시행 받을 환자 2명, 턱뼈 골절로 개방교정술을 받을 환자 1명입니다.’
이 경우 나는 수술실에 들어가서 준비된 수술만 하고 나오면 되지만, 그 이외의 여러 가지 복잡한 일들은 내게 수련을 받는 제자들의 몫이다. 수술 전에 마취에 필요한 검사를 시행하여 그 결과가 이상이 없는지 확인하고 환자와 보호자에게 수술과정을 설명하고 수술동의서를 받는다. 수술실 입구로부터 환자를 수술실로 데리고 이동하여 수술대에 눕히고는 가슴에 심전도를 붙이고, 팔에 혈압계를 감고, 손가락에 맥박산소측정기를 꽂는다. 마취과 의사가 마취를 시키는 동안 옆에서 줄곧 대기하는 것도 그들의 일이다. 수술하는 동안 조수를 서며 피를 닦고 실을 자른다. 수술 후 환자를 깨우면 회복실에 데려가고, 병실에 올라가서도 수술 후 처방을 입력해야 일이 끝난다.
나의 제자들은 농기구를 숨겨놓는 백장선사 상좌들의 마음으로 나의 수술을 돕고 있다고 늘 생각해 왔다. 백장은 자신이 깨달은 정법안장을 자신의 노동으로 보여주었듯이, 나도 삼십여년간의 수술로서 깨달은 나의 수술 기법을 내게 배우는 제자들에게 마지막까지 전해주려 한다.
“그 늙은이는밭을 떠난 적이없었는데도밭에 얽매이지 않았다는데낡은 이 몸은늘 떠나려고 했는데도얽히고설켜서발목의 거미줄을 훑어버리려버둥거리지만쇠사슬처럼점점 조여들기만” 졸시 「백장과 나」가 생각났다.
일하면서도 그 세계에 얽매이지 않는 백장선사 같은 도인들에 비해, 세속에 살면서도, 벗어나려 해도 그러지 못하는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일상에 아등바등 얽매인 마음을 ‘그 늙은이’가 ‘경작’을 통해 해방·해탈 시켰듯이, 나도 마지막까지 내 수술칼로 수술하며 번뇌를 잘라내려 한다. 아직도 수술을 하노라고 자부하면서.
황건 인하대 의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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