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는 국왕 루이 15세 앞에서 연주하며 극찬을 받았고, 오스트리아 빈 궁전에서 어린 왕녀 마리 앙투아네트 앞에서 연주했을 때는 그녀에게 청혼했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13~15세 무렵까지는 이탈리아 전역을 돌며 여행을 했는데 이때 교황으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했다. 이와 함께 이탈리아의 작곡가이자 음악학자인 음악 이론의 권위자 마르티니(Giambattista Marti´ni, Padre)로부터 음악이론과 작곡을 배웠으며, 이탈리아의 기악과 성악을 직접 접하는 등 새로운 음악 지식과 기교를 연마하며 유럽 제1의 음악가로 성장해 나갔다. 그 후 잘츠부르크로 돌아온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친구이자 당대 최고의 음악가로 이름을 날렸던 하이든(Franz Joseph Haydn)과의 만남을 통해 음악적인 성장에 또 한 번 박차를 가하게 된다.
“이 아이는 세상에서 최고로 뛰어난 작곡가가 틀림없네. 지금까지 나는 이런 천재적인 작곡가는 본 적이 없다네.”
모차르트를 지도한 하이든이 친구인 레오폴트에게 고백한 이 말은, 어린 모차르트의 음악 수준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가를 대번 알려주는 듯하다.
■ 불행한 천재가 일궈낸 눈부신 음악!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를 이끌어 냈던 모차르트의 천재성. 많은 음악가를 좌절시키고 모든 음악가의 부러움을 샀던 모차르트의 그 천재성. 그러나 한편으로 바로 그 천재성은 모차르트 개인에 있어서는 커다란 불행의 씨앗이었다.
멋모르고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세계를 누비며 연주력을 뽐냈던 모차르트는, 자아가 형성되던 청년기를 맞으며 많은 고민과 갈등에 휩싸이게 된다. 그는 너무 어린 나이에 사회생활을 시작해 험한 세상과 마주해야 했는데, 그 속에서 크고 작은 상처들을 받게 된 것이다. 결국 스무 살 이후부터 모차르트의 삶은 불행으로 접어들기 시작했고, 그 길은 죽음을 맞이하던 순간까지 이어져 있었다.
신동이 나이를 먹자 그에 대한 세간의 주목도 함께 사그라졌다. 청년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반대로 사랑했던 여인과 이별해야만 했고,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여인과의 결혼생활은 끝끝내 불행했다. 또 생계를 위해 소나타, 실내악, 교향곡, 협주곡, 심지어 종교음악까지 닥치는 대로 작곡을 했지만 늘 가난했다. 그이 3대 걸작 오페라이자 인류가 만든 최고의 예술 작품이라고 평가받는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비롯해 오페라 <돈 조반니>, <마술피리>, 교향곡 <주피터>, 수많은 피아노곡과 바이올린 협주곡, 그리고 레퀴엠에서 가곡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모차르트의 명곡은 한 끼도 배불리 먹을 수 없었던 비참한 상황 속에서 만들어졌던 것이다.
정승용 지휘자ㆍ작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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