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가들 열정과 함께한 20년··· 전시·창작의 공간
오전 내 쏟아지던 장맛비가 미술관에 들어설 무렵 그쳤다. 미술관 마당의 잔디밭이 더없이 싱싱하다. 푸른 숲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모던풍의 영은미술관 건물 외벽에 숫자 ‘20’을 새긴 커다란 현수막이 눈에 들어온다. 2000년에 개관한 영은미술관이 20주기를 맞았다는 것이다. 스무 살 청년으로 성장한 영은미술관(관장 박선주)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1층 전시실 입구에 두 개의 흉상이 나란히 서 있다. 영은미술관 설립자인 이준영 명예이사장(1917~2007년)과 그의 아들 이상은 회장(1940~1992년)이다.
“나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난하고 잘 알지 못하는 것이 항상 마음에 걸렸다. 어릴 때 가난해 겪은 고생과 남들처럼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것은 내 마음속에 언제나 한으로 남아 있다. 내 일생의 마지막 사업을 후손들에게 남기고 싶다. 이 사업을 통해 한국 현대미술 진흥발전에 기여하고 세계미술 속에 한국 미술의 위상을 높이고 싶다.” 설립자 이준영 이사장의 회고록 <작게, 낮게, 강하게>에 실린 글이다. 그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여러 문화 산업 중에서도 미술을 택한 것은 우리나라에도 미술계통에 훌륭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 많은데 경제적 뒷받침 및 미술에 대한 이해부족 등 사회적 여건이 성숙하지 못해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함으로써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또 미술가들을 위한 적당한 제작실이나 전시실도 부족한 상태이기 때문에 이를 지원하는 것은 우리나라 문화 발전을 위해서 매우 뜻있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설립자는 자신의 이름 이준영의 ‘영’자와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들 이상은의 ‘은’자를 따서 ‘영은미술관’이라 이름을 지었다는 사실을 밝히며 이렇게
덧붙였다. “이 사업을 통해서 상은이를 영원히 기념하고 싶고 또 한편으로는 내 일생의 마지막 사업임을 후손들에게 남기고 싶다는 생각에서 이렇게 명명한
것이다.”
영은미술관은 한국예술문화의 창작활동 지원을 목적으로 1992년 11월에 설립한 대유문화재단과 함께 2000년에 개관한 사립미술관이다. 영은미술관은 다
양한 장르의 작품을 소장·전시하고 있을 뿐 아니라 국내 사립미술관 최초로 국내외 작가를 지원하는 창작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다. 박선주 관장은 “미술관
자체가 살아있는 창작의 현장이면서 작가와 작가, 작가와 평론가와 기획자, 대중이 살아있는 미술(LivingArt)과 함께 만나는 장을 지향목표로 삼아 새로운 문
화를 선도하는 문화촉매공간이 되기를 지향해 왔다”며 지난 20년의 노정을 회고하고 있다. 영은미술관을개관하기 1년 전인 1999년 12월에 대유문화재단의
주최로 국제세미나를 열었다. 그 주제가 ‘21세기 새로운 미술관의 비전과 운영안’이다. 이처럼 영은미술관은 21세기를 선도하는 새로운 형식의 미술관을 지향한다는 지향점을 분명히 선언하고 출발해 20년 세월을 달려왔다.
■ 20주년 특별기획전: 영은지기, 기억을 잇다
‘영은지기, 기억을 잇다’는 미술관 개관 2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기획전의 이름이다. 여기서 ‘영은지기’란 영은미술관 출발 때부터 함께 한 작가와 큐레이터, 자원봉사자를 비롯한 관계자 모두를 가리키는 말이다. 특별기획전에는 영은창작스튜디오를 거쳐 간 작가 총 240여명이 참가해 200여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세 차례에 걸쳐 열리는 기획전의 주제도 흥미롭다. ‘Ⅰ진실되게, Ⅱ꾸준하게 , Ⅲ가치있게’라는 꾸밈없는 이름에서 영은미술관의 설립 이념과 지향점이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첫 번째 전시 ‘진실되게’는 창작스튜디오 1기부터 7기(2000~2010년) 작가들의 작품을 4월부터 지난 6월28일까지 전시했다. 7월4일부터 시작된 두 번째 전시는 8기부터 9기(2011~2016년) 작가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가을에 열릴 세 번째 전시는 10기(2016~2018년)와 11기(~현재)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할 예정이다.
■ 진실되게 꾸준하게 가치있게 안내를 해 준 송민정 학예사는 이번 기획전의 특별함을 이렇게 들려줬다. “이번 전시는 영은미술관이 개관 20주년을 맞이해 영은창작스튜디오 작가들의 소장 작품을 한 자리에서 대규모로 공개한다는 것에 큰 의의가 있다. 2011년부터 2016년까지 5년 동안의 짧은 기간인데도 80
점에 이르는 다양한 작품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2010년대 초반의 평면회화, 설치미술, 조각등 여러 장르의 작품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다.”추상화의 조형적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박승순의 <정제된 이미지Ⅲ>, 드로잉에 대한 두 가지 대비되는 시선을 표현한 최영 작가의 연작, 공학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태양의 궤적을 좇는 이장원의 설치작 <There is> 등 중진작가와 신진작가를 포함해 약 70명의 작품 86여점을 선보인다. 이 작품들은 현대인들의 일상을 범람하는 SNS와 그로 인한 예술품의 복제와 소비가 무분별하게 이뤄지기 시작했던 2010년대에 제작된 것들이다. 작가들은 현실을 외면하듯 개인마다의 철학과 심오한 사유의 결과를 반영한 작품들, 또는 매체 본질에 대한 실험적 작품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방혜자의 ‘빛의 탄생’은 눈동자처럼 강렬하게 시선을 사로잡는다. 크리스티안 발자노의 ‘CHOOSE YOUR LIFE1’은 캔버스에 금박을 입히고 부식시켜 표현한 것인데 폭풍에 일렁이는 세찬 파도처럼 시선을 파고드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김기환의 ‘에이브러햄 링컨’은 아크릴과 철, 감속모터를 설치해 링컨의 표정이 자연스럽게 끊임없이 변화하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모니터를 통해보았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재미와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무릇 최상의 감상은 작품 앞에서 한동안 걸음을 멈추고 응시하다가 가까이 다가갔다가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서기도 하며 대화를 나눠야 비로소 말을 걸어온다. 물론 운 좋으면 첫눈에 눈길을 사로잡거나 가슴으로 파고드는 작품도 만날 수 있다. 2층의 제2전시장에는 미술관의 20년 역사가 촘촘하게 기록돼 있다. 미술관이 개관한 2000년부터 복합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표방하고 시행했던 전시와 교육, 영은창작스튜디오, 음악회 등 다양한 영역의 아카이브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20년 동안 진행했던 주요 전시 포스터와 도록을 비롯해 영은미술관에서 작가들과 제작한 아트 상품도 전시하고 있다. 또한 전시실과 야외 조각공원, 창작스튜디오를 스마트 기기를 이용해 360도 가상체험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관람객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가장 따끈한 최신 미술품을 보려거든 4전시실(지하)을 찾아야 한다. 현재 입주 작가 이다(본명·이주연)의‘일렁 Sway’전이 열리고 있다. 추상화 작가 이다의 재미있는 작품은 다음달 9일까지 감상할 수 있다.
■ 미술관에서 여름나기
영은창작스튜디오 프로그램은 재능과 열정은 갖추고 있으나 창작 여건이 좋지 않은 작가들에게 소중한 곳이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환경에서 작업에 전념하고, 갓 생산한 작품을 전시하며 이웃 작가들과 일반 관람객과의 만남과 대화가 이뤄지는 곳이다. 이처럼 미술관 내에 작가와 연구자가 생활하면서 작업과 연구할 수 있다는 것이 영은미술관의 자랑이다. 작업실도 평면작업실과 입체작업실이 구분돼 있으며 작업실과 가까운곳에 생활공간이 있다. 장기작가는 2년을 머물며 개인전을 기획하고, 평론가와 함께 워크숍을 진행하며, 연합전에 참여하는 기회를 부여하고 있다. 단기작가는 3개월에서 6개월을 머물며 작품을 창작하고 전시할 기회를 제공한다. 중견 이상의 국내 및 해외 거주 작가들에게 개인전을 열 수 있는 기회도 마련해 주고 있다. 역대작가 중에서 전시 공간 지
원이 절실한 작가에게 기회를 다시 부여해 주는 제도도 있다. 심사를 거쳐 입주하게 되는 작가들에게 작업실 1실과 숙소 1실을 제공한다. 시각미술 전 분야에 걸쳐 모집하고 있으니 관심 있는 작가들은 영은창작스튜디오의 문을 두드려 볼 일이다. 전시실을 나와 다시 미술관 주변을 둘러봤다. 산허리에 자리 잡은 미술관 앞으로는 경안천이 흐르고 뒤로는 잣나무 숲이 있다. 배산임수의 명당에 자리 잡은 미술관은 ‘2001한국건축문화대상’에 입선한 ‘작품’이다. 잔디밭
에 펼쳐진 야외조각공원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누구나 좋아할 것 같다. 올여름 피서는 인파로 북적이는 바닷가 대신 미술관 순례를 계획해보면 어떨까. 그 시작은 20살청년이 된 영은미술관부터.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사진=윤원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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