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 칼럼] 국치일에 생각하는 ‘경찰권’ <國恥日>

구한말 총리대신 이완용은 1909년 12월22일, 서울 명동 성당에서 베르기 국왕 추도식에 참석하고 나오다 이재명 의사의 습격을 받고 상처를 입었다. 겨울이어서 두꺼운 외투를 입어 상처만 입고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그는 이 충격으로 이듬해 봄 서울을 떠나 충남 온양에서 장시간 요양에 들어갔다. 그러나 6월에 이완용은 뜻하지 않은 방문객을 맞이한다. 통감부에서 내려온 오꾸라 비서관이다. 그는 이완용에게 대한제국의 경찰권을 일본에 이양한다는 조서를 내밀며 서명을 강요했다. 이완용은 아무리 친일파 매국노 소리를 들어도 경찰권을 갑자기 내놓으라는 일본에 대해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보다시피 요양 중이고 박제순 총리대신이 정무를 포괄하고 있으니 그와 상의하라’며 완강히 버티었다. 그러자 오꾸라는 이완용의 방을 나와 서울 통감부에 전보를 보내 이완용의 후속조치에 대한 훈령을 요구했다. 통감부에서 곧 연락이 왔다. ‘새로 부임하는 데라우치 통감의 뜻’이라고 이완용에게 말하라는 것이다. 데라우치(寺內正毅)는 초대 조선총독을 거친 육군 대장으로 일본 총리를 지낸 거물이며 강경파였다. 이완용도 데라우치라는 말에 두려움을 느껴 오꾸라 비서관이 내민 경찰권 이양에 대한 조서에 서명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1910년 6월24일 오후 8시 대한제국 경찰권을 일본 통감부에 이양하는 조인식이 거행됐다. (山邊建太郞 日·韓 합병小史 참고) 경찰권을 빼앗은 일본은 ‘순사(巡査)’라고 부르는 경찰을 전국에 배치, 철저한 국민 감시와 탄압에 들어갔고 그래서 우는 아이에게 ‘순사온다’고 하면 울음을 그치게 할 정도의 공포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8월29일 강압적으로 한·일 합방을 실현한 것이다. 그러니까 경찰권을 서둘러 빼앗은 것도 한·일 합방을 위한 정지작업의 하나였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1910년 8월29일 그래서 우리는 이날을 국치일(國恥日)로 정하였고 110주년을 맞는다. 합방에 앞서 일본이 우리의 국권을 빼앗은 것이 경찰권뿐만 아니지만 실제로 강탈의 도구로 쓴 것이 경찰권이었다.

우리나라가 국권을 회복하고도 경찰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해 왔다. 공공질서의 수호자였고 6ㆍ25때는 수많은 희생을 치르기도 했다. 반면 우리의 권력은 경찰을 본연의 임무에서 권력 보위의 도구로 악용한 오명을 남기기도 했다. 자유당 정권하에서 빚어진 3ㆍ15 부정 선거 개입을 비롯해 사찰, 고문 기술자 이근안의 남영동 대공분실, 부천 성고문 사건 등 그 불명예스런 행적은 끝이 없다. 최근에도 울산시장 선거개입의혹이 수사 중이거나 기소되기도 했으며 소위 드루킹 관련자들의 불법 댓글 작업에 대한 경찰의 수사기법이 명쾌한 공감을 얻지 못하는 등 사례들이 계속되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이제 검ㆍ경 수사권이 새롭게 조정되는 시대를 맞이했다. 관련 형사소송법과 검찰청법 개정안도 국회를 통과했다. 그야말로 지금까지의 검·경 관계가 일대 전환점을 맞게 된 것이다. 엄청나게 그 영역이 넓어졌고 그 권한도 막강해질 것이다.

과연 우리 경찰이 이 막강해진 영역을 정치권력에 흔들리지 않고 민주경찰을 지향해 나갈 것인가. 과거의 모습으로 회귀하지는 않을지. 두려운 마음으로 지켜볼 뿐이다.

변평섭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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