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일간 이어진 장마에 태풍 마이삭까지 몰아쳐 경기지역의 농작물 피해가 잇따르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또 다른 태풍 하이선이 곧 한반도를 관통할 것으로 전망돼 주저앉은 농민들은 일어설 힘조차 내기 어렵다.
3일 오전 이천시 신둔면 수광1리는 밤사이 태풍 마이삭이 몰고 온 비바람으로 5만여㎡에 달하는 논의 벼가 모두 쓰러졌다. 드넓게 펼쳐진 논에는 바람이 휩쓸고 간 자국이 선명했다. 이곳 주민들은 오는 20일께 벼를 수확할 예정이었지만, 불과 3주 앞둔 시점에서 한해 농사가 망가졌다. 벼가 쓰러지면 싹이 나기 시작해 수확량이 크게 줄어드는 데다 걷어들인 벼 역시 상품 가치가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쌀은 정미소에서 하~최하 등급을 받지만, 농민들은 먹고 살기 위해 아쉬운 소리조차 못한 채 헐값에 쌀을 팔아야 한다.
50년째 이곳에서 벼 농사를 지어온 이장 정종복씨(65)는 “바람이 어디로 몰아칠지 알 수가 없으니 막을 수도 없다”며 “다음 태풍이 한반도를 덮친다는데, 그나마 남아있는 벼들도 모두 쓰러질까 걱정”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날 오후 화성시 서신면 서곳리에서 만난 이장 김이수씨(56) 역시 낯빛에 근심이 가득했다. 그가 28년째 키워온 신고배는 대만을 비롯한 동남아까지 수출되지만, 올해는 절망 그 자체다. 전날 몰아친 강풍으로 절반에 가까운 배들이 모두 낙과했기 때문이다. 2만여㎡에 달하는 그의 밭에는 나무 한 그루마다 약 30개에 달하는 열매들이 떨어져 있었다. 아직 가지에 달려있는 열매는 손만 대도 우수수 떨어졌다.
김씨는 “수도권에 영향이 덜하다는 태풍으로도 이 정도인데 다음 태풍 땐 아마 80%가량 낙과할 것 같다”며 “평생 농사를 지어왔지만 자연은 막을 재간이 없다”며 떨어진 배를 어루만졌다. 그가 한탄 섞인 이야기를 늘어놓는 동안에도 야속한 바람은 열매를 계속 떨어뜨렸다.
태풍으로 인한 피해는 경기남부 뿐만 아니라 북부지역에서도 발생했다.
연천군 군남면 진상리에서 야채 농사를 짓는 정태주씨(62)의 하우스 14동(8천600여㎡)은 모두 물에 잠겼다. 그의 밭은 주변에 제방이 설치돼 있지 않아 폭우에 취약하다. 지난달 초 북한의 황강댐 개방으로 한 차례 밭이 잠겼는데 이후 태풍이 연달아 몰아치면서 복구할 엄두조차 내기 어려운 상황이다. 결국 이 농부가 비지땀을 흘려가며 키워낸 오이와 호박들은 모두 폐기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정씨는 “농민들이 자연재해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지자체의 도움이 절실하다”며 “폭우 때마다 물이 넘쳐 피해를 보지 않도록 제방을 설치해달라”고 호소했다.
한편 기상청에 따르면 마이삭이 빠져나간 자리에 더 강한 제10호 태풍 ‘하이선’이 몰아칠 예정이다. 이 태풍은 다음주에 한반도에 상륙할 예정인데, 예상 경로가 내륙을 관통할 것으로 관측돼 대규모 피해가 우려된다.
기상청 관계자는 “오는 7일 남해안에 상륙할 가능성이 크다”며 “최대 초속 40m의 강풍이 예상되니 각별한 대비가 요구된다”고 설명했다.
장희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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