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입구에선 솟대가 이방인을 맞았다. 낯선 이에게는 계면쩍지만, 인사도 건넸다. 가끔은 느티나무 한 그루가 헛기침도 했었다. 마을로 들어서면 집들이 어깨를 마주하고 옹기종기 앉아 있었다.
▶그 안쪽으로 어르신들이 모이는 사랑방이 누워 있었다. 그 다감한 풍광들을 보노라면 어느새 오롯이 마을 한복판으로 들어선다. 꼬불꼬불 굽어 있지만 정겨웠다. 꿈을 꿀 때마다 마을 안길이 펼쳐졌다. 학창시절 읽었던 고(故) 이문구 작가의 장편소설 ‘관촌수필(冠村隨筆)’ 첫 구절이다.
▶1970~1980년대를 거치면서 이 땅에서 펼쳐졌던 새마을운동은 마을 안길을 깔끔하게 단장시켰다. 그즈음 황톳길이나 흙길이 콘크리트로 포장되기도 하고, 아스팔트로 덮이기도 했다. 손님을 맞으려고 예의를 갖췄던 셈이다. 유교적인 경향도 거들었다. 마을 안길을 걸으면 그 동네의 진면목을 알 수도 있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마을 전체의 길이었고, 공동 재산이기도 했다.
▶산업화 끝 무렵 마을 안길도 새로운 전환기를 맞는다.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면서다. 소유의 개념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길이 없는 구석에 처박힌 땅은 쓸모가 없다는 ‘맹지(盲地)’라는 말도 등장했다. 길과 맞닿은 부분이 전혀 없는 땅이라는 뜻이다.
▶21세기 들어 귀촌 현상에 외지인이나 이른바 부재지주들의 농촌 토지 소유가 가속화 되면서다. 네 땅인지 내 땅인지 구분이 확실해졌다. 그러면서 마을 안길로 사용됐던 땅에 대해서도 소유 개념이 명확해졌다. 분쟁도 이어졌다.
▶최근 코로나19로 힘든 시기인데도 어김없이 도내 곳곳에서 마을 안길과 관련된 분쟁이 또다시 불거지고 있다. 따지고 보면 마을 안길과 관련된 분쟁의 역사는 깊기도 하고, 얕기도 하다. 대한민국이 전통적인 유교 사회였던 시절에는 감히 상상치도 못했던 일들이 다반사처럼 발생하는 것도 그래서 다 까닭이 있다. 산업화가 진행되던 시절에는 먹고사느라 슬그머니 넘어갔던 사안들이었다.
▶그러나 무역이나 경제규모로 세계 10위권 국가로 성장하면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까다로운 쟁점이 된 까닭이다. 어려웠던 시절, 우리가 그토록 선망했던 자본주의의 민 낯이 드러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씀바귀를 먹은 뒤끝처럼 씁쓸하다.
허행윤 지역사회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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