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구릉 위 철로에 한 무리 소 떼가 지나간다. 기관사는 낡은 철마의 탄력을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재촉이나 하듯 시커먼 연기를 하늘을 향해 토해낸다. 느긋한 목동은 기적 소리도 아랑곳하지 않고 막대기로 바닥만 툭툭 내리치며 재촉한다. 눈앞에 펼친 정겨움과 느림의 여유가 묻어 있다. 정겨움이 담긴 낭만적인 풍경을 카메라에 담으려 하자 기차는 시샘하듯이 굽은 철길을 돌면서 사진 찍는 것을 방해한다.
이 지역 기후와 토양은 사탕수수 경작에 알맞아 식민 초기부터 농업이 번성하였다. 그러나 16세기 초 원주민만으로는 노동력이 턱없이 부족하여지자 쿠바 총독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왕실의 허가를 받아 아프리카 노예를 수입하였다. 설탕 산업 전성기에는 이곳에 상주한 노예가 3만 명이 넘었고 이들은 농장 일 외에도 항구로 설탕을 운반하기 위한 철로와 도로 건설에 동원되었다.
철길 옆으로 스치는 자연 속 아름다운 풍경과 현지인의 치장하지 않은 남루한 속살을 가림 없이 바라보며 20여 분쯤 지나자 기차는 마나카 이즈나가에 도착했다는 알림 신호를 우렁찬 기적소리로 대신한다. 플랫폼에 발을 내딛자 제일 먼저 정복자의 탐욕스러운 상징인 노예감시탑이 보이고 농장 입구에는 장사할 채비를 마친 상인들이 관광객을 향해 손짓한다.
1795년 스페인 바스크 출신 악명 높은 노예상 ‘페드로 이즈나가’가 이곳으로 이주하여 광활한 땅을 사들여 사탕수수농장을 조성하였다. 그는 사업이 번창하자 1816년 노예를 감시하려고 7층으로 된 45m 높이의 ‘이즈나가 탑’을 세웠다.
이 탑은 노예가 동원되어 자신들을 감시하는 망루를 스스로 지은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이즈나가는 이 망루에 올라 노예를 감시하며 사탕수수 생산량을 늘렸고 당시 이 지역에 있던 57개 설탕공장 중 15개를 소유하였을 정도로 부유한 농장주가 되었다.
지금은 없지만, 망루 꼭대기에는 서로 다른 소리를 내는 세 개의 종이 매달려 있었다고 한다. 큰 종은 작업 시작과 끝을, 중간 종은 휴일을, 작은 종은 부활절 성주간을 알리는 용도였다. 종 셋이 모두 울리면 노예가 탈출하거나 반란이 일어났다는 신호이고 해적이 침입할 때도 함께 울렸다.
농장주인의 모진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자유를 찾아 탈출하거나 반란을 일으키면 죽임을 당하였고 때로 해적이 출몰하여 전투가 벌어지면 수탈자 이즈나가를 위하여 목숨 바쳐 싸워야 했던 아픈 수난의 역사를 간직한 상징물이다.
박태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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