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시종, 시대를 따름

예수가 살았던 시기의 유다인은 코르반 규정을 준수하였다. 이에 따라 소유 재산을 ‘코르반’(qorbn), 곧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로 서약하면, 이 재산은 하느님께 귀속돼 그 외 어떤 목적으로도 사용할 수 없었다.

코르반 규정을 둘러싼 논의는 예수 시대를 지나 기원후 2세기 무렵까지 이어졌다. 누군가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봉헌을 위하여 코르반 서약을 하기도 하였지만, 다른 누군가는 분별없이 혹은 부정적 의도 하에 서약을 맺어 사회적 혹은 종교적 갈등을 야기하였기 때문이다. 랍비들은 계명의 준수와 코르반 서약의 준수 사이에서 고민하는 이들에게 먼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킬 것을 가르쳤고, 서약의 엄격함에 묶여 있는 이들에게는 규정 준수의 면제를 허락하기도 했다.

2021년 코로나19가 세상의 변화를 재촉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 순응하는 오늘날의 노력도 우리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지난 1월 ‘화상 제사’로 진행된 퇴계 이황 선생(1501~1570)의 450주년 불천위 제사는 좋은 예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 이전에는 퇴계 문중을 포함해 퇴계 선생을 존경하는 수많은 이들이 퇴계 종택(宗宅)에 모여 선생의 삶과 업적을 기리는 제사를 지냈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제한 속에서 소수의 제관만이 종택에 모여 제사를 바치고, 다른 사람들은 비대면으로 제사에 참여하였다. 작년만 하더라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이색적 풍경이다. 도산서원은 코로나 시대를 맞아 심각한 도전을 받았지만, 새로운 시험을 통하여 위기를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시대를 따르라는 퇴계 선생의 가르침에 기반을 두고 있다. 선생은 “의어금이불원어고(宜於今而不遠於古: 오늘날에 마땅하고 옛날과 멀리 벗어나서는 안 된다)”를 설파하며, 전통 예법의 기본을 존중하면서도 현실의 상황에 맞출 수 있는 개방성과 유연성을 강조하였다.

코로나가 지나간 그 자리에는 무엇이 남아 있을까? 조심스럽게 예상할 수는 있지만,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이른 바 ‘새로운 시대’가 찾아올 것이다. 그 시간이 찾아왔을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옛것에 대한 그리움이나 집착이 아닌, 새것을 수용할 수 있는 용기이다. 시종(時從), 곧 시대를 따르라는 퇴계 선생의 가르침은 포스트 코로나를 준비하는 우리의 길잡이가 아닐까?

정진만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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