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안성맞춤박물관

조선시대 찬란했던 유기, 부활을 꿈꾼다
1600년 이전부터 ‘안성유기’ 널리 제작 전국적 명성
사도세자·혜경궁홍씨 혼례 등 국가의식에도 등장
일제, 밥그릇·숟가락·젓가락 빼앗아 무기 제작 수난

1. 안성시 대덕면에 위치한 ‘안성맞춤박물관’은 지난 2002년 ‘안성맞춤’ 이라는 말로 유명한 안성유기와 안성의 농업 및 향토문화를 소개하고자 건립된 시립박물관이다. 안성맞춤박물관 전경. 윤원규기자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수저와 젓가락 한 쌍을 바라본다. 밤늦게 조심스레 문을 열고 방에 들어가면 문 앞에 앉아 계시던 어머니는 아들의 찬 손을 잡고 꾸중 대신 “배고프지?”라며 아랫목 이불 밑에 묻어두었던 밥그릇을 꺼내셨다. 복(福)자가 새겨진 밥뚜껑을 열면 하얀 김이 모락모락 솟아올랐다. 따뜻한 밥은 사랑이다. ‘놋그릇’으로 불렀던 유기그릇은 보온성이 뛰어나 오랫동안 한국인의 사랑을 받았으나 1970년대부터 스텐 그릇에 밀려나면서 이제는 기억 속에만 존재하고 있다. 유년의 행복한 추억을 소환해 준 곳은 안성맞춤박물관이다.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 안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대학 부설 박물관으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으나 안성시가 설립하고 운영하는 ‘시립박물관’이다. 2002년에 개관했으니 올해가 20주년이 된다. 시립박물관으로는 이른 시기에 문을 연 박물관이다.

■안성장은 서울장보다 두세 가지 더 난다

안성시가 2040년에 인구 40만의 자족도시를 건설할 계획을 세웠다. 대부분의 도시들이 인구가 줄어 고민인데 안성은 인구가 꾸준하게 늘어나고 있다는 소식이다. 사실 안성은 조선시대부터 부유한 고을이었다. 서울로 이르는 관문이었던 안성으로 충청, 전라, 경상의 삼남의 물건들이 모여들었고, 팔도의 장사꾼들이 몰려들었다. 천자문에서 ‘벌 열(列)’자를 “이틀 이레 안성장에 팔도 화물 벌 열”이라 뜻풀이했다 하며, “안성장은 서울장보다 두세 가지 더 난다”는 말이 전해질 만큼 안성에서 유통되는 물건이 다양하고 품질도 우수했다고 한다. 2일과 7일 닷새마다 열리던 안성장은 일제강점기 때에는 대구장, 전주장과 함께 ‘조선 3대 장’으로 손꼽혔다. 우리에게 익숙한 ‘안성맞춤’이란 말의 유래를 ‘안성기략安城記略’이란 책은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안성은 고래(古來)로 유기가 명산이요 안성유기는 견고하고 정교하게 제조하므로 전국에 환영을 받아왔나니…‘안성마침’이라 하여 전국에 통용되나니라.” 안성맞춤박물관은 ‘안성맞춤’이라는 말을 탄생시킨 안성유기를 입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전문박물관이다. 물론 박물관은 안성의 포도, 안성농악 같은 향토문화나 안성의 근대역사까지도 살펴볼 수 있다.

2층 농업역사실에서는 안성 지역의 농업에 대한 역사와 농업 관련 문화를 유물과 모형을 통해 만날 수 있다. 농업역사실 전경. 윤원규기자<br>
2층 농업역사실에서는 안성 지역의 농업에 대한 역사와 농업 관련 문화를 유물과 모형을 통해 만날 수 있다. 농업역사실 전경. 윤원규기자

홍원의 학예연구사의 안내를 받아 전시실을 둘러본다. 유기 제품들이 가득하기 때문일까 20년 된 전시실이 환한듯하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비슷한 형태의 전시물들이 가득하다. 학예사의 설명을 듣고 걸음을 멈추자 전시물들이 살아나기 시작한다. “그릇 밑바닥에 새겨진 글자를 살펴보세요. ‘안성맛침’ ‘안성맞침’ ‘안성맛춤’ ‘안성’이라 새겨진 게 보이시죠? 안성유기의 명성을 흉내 낸 짝퉁도 있으니 어디 있는지 찾아보세요.”

안성유기에 대한 기록은 1600년대 초부터 등장한다. 한문사대가로 알려진 택당 이식(1584~1647)의 문집 ‘택당집(澤堂集)’에 안성 유점(鍮店)에서 하룻밤을 묵었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유점’은 유기를 만드는 장인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장인들이 수공업촌을 이루고 있을 정도였다면 1600년대 이전에 이미 안성에서 유기가 널리 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기록이다. 조선시대 안성은 동서와 남북으로 교통로가 발달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수공업이 성행하였다. 풍석 서유구(1764~1845)가 지은 ‘임원경제지’에 따르면 안성장에서 갓?삿갓, 도롱이, 가죽신 같은 각종 수공업품이 장에서 활발히 거래되었다. 전시실에서 연암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도 만날 수 있다. 장사꾼으로 나선 허생이 안성장에서 제사상에 올릴 과일과 갓과 망건을 만드는 데 쓰이는 말총을 독점하여 부를 축적하는 이야기를 기억하면 조선시대 안성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도세자와 혜경궁홍씨의 혼례나 순조의 비 순원왕후의 장례 같은 국가의식에서도 안성유기장이 등장한다. 안성유기장은 “선수장인(善手匠人)”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국가 의례에 불려다녔던 것이다. 선수장인은 오늘날의 용어로 ‘명장(名匠)’이라는 말과 같다.

유기제작방법에 대한 모형과 유기를 직접 만져볼 수 있는 체험코너, 안성유기의 역사와 관련 문화를 만날 수 있다. 윤원규기자<br>
유기제작방법에 대한 모형과 유기를 직접 만져볼 수 있는 체험코너, 안성유기의 역사와 관련 문화를 만날 수 있다. 윤원규기자

여기서 유기제작법은 세 가지를 살펴보자. 가장 쉬운 주물제작법은 구리에다 주석이나 아연을 78:22의 비율로 혼합한 쇳물을 녹여 형태를 만든 틀에다 부어 넣어 식힌 다음 다듬고 광을 내어 완성하는 기법이다. 쇳물을 녹여 바대기라 불리는 바둑알처럼 둥글납작한 쇳덩이를 만들어, 11인이 한 조가 되어 불에 달구어가면서 두들겨 그릇의 형태를 이루는 방짜제작법이 가장 고급기술이다. 반방짜라고 부르는 기법은 그릇의 절반쯤은 주물식으로 만들어 집게로 집어가면서 오목하게 두드리거나 짓눌러 마무리하는 것으로 현재 고급제품은 대부분 이 방식으로 제작된 것이다.

명성이 자자하던 안성유기도 개항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수난을 면치 못했다. 1930년대 말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일제는 조선인의 밥상에 오르던 밥그릇과 숟가락, 젓가락까지 빼앗아가 무기로 만들었다. 해방되면서 잠시 부흥을 맞이했던 유기 제품은 6·25 이후 연탄을 사용하면서 다시 밀려나게 된다. 유기는 연탄가스에 변질되기 쉬운 성질을 지녔기 때문이다. 놋그릇은 시간이 지나면 푸른 녹청이 생겨 부녀자들이 애를 먹었다. 그릇을 깨끗하게 닦는 것은 여인들의 일과이자 풍속으로 자리 잡았다.

기와를 곱게 빻아 가루를 수세미에 묻혀 반질반질 윤이 날 때까지 닦는 인형을 보며 유년시절을 떠올리는 관람객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옛말이다. 현재의 유기 제품은 성능이 크게 좋아져 박물관이 개관할 때 전시된 20년 된 유기작품들이 은은한 빛을 내뿜고 있다. 우아한 나비촛대나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 생동감 넘치는 물고기 형상의 자물쇠 같은 생활용품에서 유기의 ‘격(格)’을 느끼는 것은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 “안성에 스무 곳 이상의 제작소와 판매점을 갖춘 거리를 조성하면 안성이 유기의 명소로 알려질 것이고, 상업화에도 성공할 것입니다.” 홍 학예사의 바람이 머잖아 이루어질 것 같다. 40만 도시 안성의 장래를 설계하는 사람이라면 유기의 가능성을 역설하는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안성 도기동산성, 백제와 고구려의 만남

2층 기획전시실에는 ‘안성 도기동산성-백제와 고구려의 만남’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2015년 9월 도기동에서 건축을 위해 발굴조사를 하다가 방어용 목책을 쌓기 위해 구덩이를 판 흔적을 발견했다. 도기동산성은 우리 역사학계에 큰 주목을 끌었다. 4~6세기에 백제가 쌓았던 도기동산성은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에 밀려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 고구려가 수개축하여 사용한 산성인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활용한 목책성이 경기 남부에서 확인된 것은 이것이 처음인데, 고구려의 영토 확장과 남진 경로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인정받아 사적 제536호로 지정되었다.

1500년 전, 백제와 고구려 전사들이 사용했을 고리자루 큰 칼과 쇠도끼와 쇠창 같은 무기류와 옥으로 만든 장신구 같은 출토 유물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손잡이가 달린 검은 잔은 디자인이 무척 세련되었다. 고구려인들이 검은색을 좋아했다는 관계자의 해설을 들으니 흥미가 더해진다. 백제와 고구려가 각축을 벌였던 도기동산성은 668년 신라가 통일한 후 방어시설로서의 기능이 사라졌다. 대신 사람들의 삶터로 변모한 이곳에서 고려와 조선을 거치며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을 남겨놓았다. 전시물 중에서 청동 발, 청동 숟가락, 청동 젓가락 같은 “파란 녹이 낀” 청동유물에 시선을 쏠린다. 이런 유물들이 안성유기로 발전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안성맞춤박물관 개관 때부터 안성에서 활동하고 있는 홍 학예연구사의 유기 사랑이 각별하다. “유기는 상품성이 충분합니다. 유기 제작자를 육성하여 유기 제품을 파는 공방거리가 조성되면 안성의 명물로 자리 잡을 것입니다.” 그의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길 빌어본다. 박물관 앞 목련꽃봉우리가 부풀어 있다. 안성유기도 목련꽃처럼 활짝 피어나기를 빌어본다.

4. 살균효과 및 강도가 높아 식기로 사용된 방짜유기는 조선시대 왕실 종묘제례에서도 사용됐다. 5. 유기전시실은 일제강점기 이래 안성에서 성행했던 주물유기 제작법 등 조선시대 대표적인 유기제작법과 제작과정을 볼 수 있으며, 안성에서 제작된 유기를 비롯하여 다양한 유기를 관람할 수 있다. 유기공방의 모습. 윤원규기자<br>
4. 살균효과 및 강도가 높아 식기로 사용된 방짜유기는 조선시대 왕실 종묘제례에서도 사용됐다. 5. 유기전시실은 일제강점기 이래 안성에서 성행했던 주물유기 제작법 등 조선시대 대표적인 유기제작법과 제작과정을 볼 수 있으며, 안성에서 제작된 유기를 비롯하여 다양한 유기를 관람할 수 있다. 유기공방의 모습. 윤원규기자

이경석(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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