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애국지사 이종훈 선생

허행윤 지역사회부 부장 heohy@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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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검사가 물었다. “조선독립이 될 줄로 생각하는가?”. 대답은 “그렇다”였다. 또 물었다. “장래에도 또 조선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이에 대한 답변도 명쾌했다. “살아만 있다면 계속 할 것이다.” 1919년 3월20일 한 애국지사의 조서기록이다.

▶이날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가 조사를 받기 19일 전(1919년 3월1일) 서울 창공에선 3ㆍ1만세운동의 깃발이 높이 올랐다. 태화관에선 민족대표 33명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吾等(오등)은 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로 시작되는 그 선언서다.

▶정암(正菴) 이종훈(李鍾勳) 선생이 그 조서의 주인공이다. 당시 선생은 환갑을 훌쩍 넘겼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최고령자였다. 그런데도 당당하게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바로 일본경찰들에게 체포돼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됐다. 그리고 참혹한 고문을 받았다.

▶재판에선 2년 형을 선고받았다. 고령에 지병까지 있어 몸이 많이 상했다. 가족들이 받았을 고충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경기도 광주 출신인 선생은 어릴 때는 한학을 배웠다. 청년시절에는 동학에 입도, 우금치전투 등 숱한 항일현장을 누볐다.

▶옥고를 치른 후에도 독립운동은 계속 이어졌다. 만주 무장투쟁과 국내 민족세력을 연계하기 위해 고려혁명당을 이끌었다. 그의 외아들인 이관영 선생도 용문산 일대 의병들을 규합, 일본에 항전하다 교전 끝에 순직했다. 이 지사의 손자인 이태운 선생도 1919년 독립선언서 준비작업 중 연락임무를 담당했다. 소파 방정환 선생과 함께 독립선언문을 인쇄하고 배포했다. 3대가 독립운동에 헌신한 명가(名家)다.

▶경기일보는 광주지역 시민단체인 ‘THE광주포럼’의 이종훈 선생 업적 기림사업 추진 발표를 보도했다. 올해를 이종훈 선생의 발자취를 알리는 원년으로 삼고 학술대회 개최 준비와 종중과의 교류를 통한 사료발굴 등을 진행한다는 계획이다.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 선생이 광주 출신임은 많이 알려졌지만, 이종훈 선생은 아직도 아는 이가 많지 않은 게 엄연한 현실이다. 이분들의 올곧은 투쟁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는 까닭이다.

허행윤 지역사회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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