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문화·생활문화·기록문화 3개 테마 상설전시
원삼국부터 현재 인구 86만 대도시 성장 한눈에
구석기·신석기·청동기·철기 등 시대별 유물 눈길
어린이체험실, 아이들이 유물 직접 보고 만지며
우리 조상들의 지혜 배우고 역사 익히는 산교육장
만날 수 있다. 윤원규기자
“하늘 같은 큰 길이 서울에 이어져/ 별처럼 늘어놓은 400개의 고을에/ 온갖 것들 무성하게 모두 다 모여 있네.” 1831에 펴낸 ‘화성지’에 실린 한시를 통해 ‘화성(華城)’을 풍요의 고을로 만들어 여민동락(與民同樂)을 실현하겠다는 정조(1752~1800)의 꿈이 실현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바다와 내륙을 아우르는 풍요의 땅 화성은 삼국통일기와 남북국시대에는 국제 무역항 당성을 통해 선진 문물이 들어오는 관문이었고, 고려시대에는 봉림사 등 사찰을 중심으로 불교문화가 꽃을 피웠다. 바다와 삼남의 길목에 위치하여 새로운 문물을 빠르게 받아들였던 화성은 일제의 무단통치에 강력하게 저항했던 역사까지 성장과 번영, 효와 애국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고장이다. 화성시의 문화유산과 역사를 알리기 위해 2011년에 문을 연 화성시 ‘향토박물관’은 개관 10년을 맞은 2020년 3월에 화성시 ‘역사박물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화성시의 성장과 보조를 맞추며 진화하고 있는 화성시역사박물관은 볼거리와 이야기가 더욱 풍성해졌다.
하고 있다. 현재 경기지역에서 백제 금동관이 발견된 것 은 화성 금동관이 유일하다. 윤원규기자
■시의 발전과 함께 성장하는 박물관
박물관의 시작부터 함께해온 이정일 학예연구사의 안내로 박물관을 둘러본다. 상설전시실은 고대로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화성의 역사를 만날 수 있는 ‘역사문화실’과 농촌과 어촌의 다양한 민속자료로 보여주는 ‘생활문화실’, 기록의 의미와 중요성을 생각해보는 ‘기록문화실’로 구성되어 있다. 전시실 입구에서 화성의 역사를 훑어본다. 원삼국시대에는 마한의 소국들이 있었던 화성지역은 삼국시대에는 ‘당성’과 ‘매홀’로, 고려시대에는 당성군과 수주라는 이름을 갖는다. 조선 초에 남양도호부, 수원도호부 설치했던 이곳은 정조 17년(1793)에 화성유수부로 승격된다. 조선말에 남양군, 수원군으로 개편했다가 일제강점기에는 수원군으로 통합되고, 1949년에 화성군으로 개편되고 수원읍은 시로 승격되면서 분리한다. 화성군은 2001년에 시로 승격되었는데 2021년 현재 인구 86만의 대도회로 성장했다.
2017년부터 4년 연속 전국 226개 시군구 중 종합경쟁력 1위를 달리고 있는 화성시는 평균 연령이 37.4세로 전국에서 두 번째로 젊고 출산율과 인구증가율도 가장 높은 편에 속한다. 화성시의 얼굴은 여럿이다. 어촌마을과 농촌마을은 물론 첨단산업시설과 동탄 신도시까지 품고 있기 때문이다.
전시실에서 낯선 풍경과 만난다. 책상 너비만 한 작은 공간에 여러면석기(구석기)와 가락바퀴(신석기), 반달돌칼(청동기), 간돌검(초기 철기), 철화청자모란무늬병(고려), 청화백자대접과 유리주전자(일제강점기)가 모여 있다! 이 학예사가 웃으며 이 독특한 공간을 꾸미게 된 사연을 들려준다. “화성의 정체성이 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사실 화성은 마한을 비롯해서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의 유물이 다 나오는 특별한 지역이다. 생활문화로 봤을 때는 바다와 내륙과 산지를 아우르고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역사 문화적 특징을 드러내는 상징하는 것으로 구성했다. 저 유리주전자는 매송면 들목조씨 문중에서 제사 때 사용하던 것인데 근현대시기 유리재질의 생활용품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요즘 보기 드문 것이다.”
하고 있다. 현재 경기지역에서 백제 금동관이 발견된 것 은 화성 금동관이 유일하다. 윤원규기자
한국을 대표하는 온돌문화를 발안리 유적을 바탕으로 주거모형(한성백제시기, 원삼국시대)과 토기시루편(삼국시대), 무문토기(청동기시대)를 모형으로 전시한 방식이 신선하다. 기안동의 제철유적과 중국과 교류했던 당성에서 출토된 토기를 통해 1500년 전 번영했던 화성을 입체적으로 재현한 것도 참신하다. 봉림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의 뱃속에 들어 있던 ‘복장유물’을 입체적으로 전시한 방식은 더욱 눈길을 끈다. 불상 안에 작은 불경을 넣었던 옛사람들의 간절한 마음까지 전해지는 듯하다. 장안면 독정리에서 발굴되었다는 명기(明器)를 살펴본다. 살아생전에 사용했을 거울과 구슬, 묘지석과 함께 묻혀 있다 출토된 갖가지 동물 모형의 토우들은 무슨 역할을 했을까. 화성시 안녕동에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융릉과 건릉이 있지만 현재 유감스럽게도 가까이서 살펴볼 수 없다. 이런 안타까움을 풀어주려는 뜻인지 모형으로 만든 융릉과 건릉의 석물을 세워두었다.
책이나 문서가 가득한 기록문화실은 어른들에게도 별 재미가 없는 공간이다. 스쳐 지나치면 낡은 책과 종이에 불과하지만, 이 속에도 재미난 이야기가 숨어 있다. 초계문신들의 시험답안지 ‘시권’에서 안경을 쓴 학자 군주 정조의 모습이 겹쳐진다. 1790년(정조14) 장용대장이 훈련원정을 지낸 김의를 장용영 초관으로 임명하는 차접(差帖:사령장)도 흥미로운 문서다. 장용영은 한양의 내영과 화성 유수부의 외영으로 운영되었는데, 정조는 내영보다 외영을 강화한다. 이때 정조는 외영의 핵심 지휘관인 초관을 김의를 비롯해 화성 출신들에게 맡겼던 것이다. 화성 축성에도 참여했던 김의는 정조 20년(1796)에 장용외영 친군위별장으로 진급했을 정도로 정조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1794년(정조18) 차도항에게 어진봉안각 위장으로 임명하는 고신(告身:사령장)도 눈여겨볼 유물이다. 천하명당 화산에 아버지를 모신 정조는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 현륭원 정자각에 걸어두었다. 초상으로나마 아버지를 가까이에서 섬기고자 하는 정조의 효심이 담긴 유물이다. 미완성의 초상화의 주인공은 신이복(1698~1786)인데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 병조참관을 역임하고 정2품 자헌대부에 올랐던 문인이다. 초상을 그릴 때 밑그림으로 사용한 ‘유지초본’을 살펴보면 초상화가 어떻게 그려지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생활문화실에 들어서면 화성이 풍요로운 고장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서쪽의 해안과 동쪽의 내륙으로 이어진 화성시는 바다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어촌과 땅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농촌이 공존하는 고장이기에 다양하고 흥미로운 생활유물을 만날 수 있다. 그중에서 솔뿌리로 정교하게 만든 바구니는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아주 특별한 유물이다. 동탄신도시가 개발되면서 사라진 ‘왕배산 산신제’에 사용된 제기와 현장을 기록한 사진에서 민간에서 전승된 무속신앙이 불과 20~30년 전까지 이어졌다는 사실도 뜻밖이다.
■화성시 역사박물관 어린이체험실
도시가 젊기 때문에 아이들도 많다. 어린이체험실은 우리 아이들이 유물을 보고 만지면서 조상들의 지혜를 배우고, 역사를 익히는 공간이다. 당성에서 출토된 토기와 기와 조각을 만져보고, 한성 백제 토기와 민무늬 토기 조각을 맞춰보며 천연 색실로 실을 꼬아볼 수 있다. 백제 사람들처럼 반달돌칼과 갈돌로 곡물을 수확하는 체험도 할 수도 있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호랑이를 잡았던 고려시대의 효자 최루백과 정조임금을 어린이체험실에서 다시 만난다. 능화문 문양 찍기, 기와 쌓기, 융릉 석물 찾기, 옛 집 이야기가 있고, 조선시대에 24번이나 포도대장을 지낸 김영처럼 활쏘기를 연습할 수도 있어 아이들이 좋아하는 공간이다.
현재 기획전시실에서는 개관 10주년을 기념하는 기획전시 ‘요리 금동관 다시 깨어나다’가 열리고 있다. 경기도에서 최초로 금관이 발견되어 역사학계의 깊은 주목을 받은 요리 금동관은 경주나 공주에서 발견된 금관 못지않게 우아하고 아름답다. 전시는 ‘세상에 나오다’(1부), ‘시간의 때를 벗기다’(2부), ‘다시 깨어나다’(3부), ‘비밀을 풀다’(4부)로 구성되어 있다. 금동관이 화성에서 왜 발견되었는지 비밀을 풀 수 있는 역사 정보와 금동신발, 허리띠꾸미개 등 백제의 화려하고 정교한 금속공예품을 가까이서 살펴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이달 23일까지 열리니 고대사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잊지 말고 찾아보자. 어린이 체험프로그램이 풍성한 화성시역사박물관은 어른들에게도 재미와 감동을 선사하는 곳이다.
이경석 연구원(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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