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4년 10월 15일. 오스트리아의 빈 시내는 대낮부터 술렁거렸다. 다른 날과 사뭇 다른 분위기가 빈 시내를 휘감고 있었다. 이유는 바로 저녁에 있을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데뷔 연주회였다. 음악가였던 아버지의 반대에도 아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당시 춤추던 도시로 불리던 빈에서 화려한 데뷔를 시도했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언론은 이런 기사를 썼다.
“잘 가라, 란너여! 아버지 슈트라우스여, 안녕(Good bye)!
안녕(Hello), 아들 슈트라우스야!“
요제프 란너와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19세기 초, 빈에 휘몰아친 왈츠 열풍을 이끈 쌍두마차였다. 요제프 란너에 의해 왈츠는 급격히 발전했고, 곧바로 요한 슈트라우스 1세가 주도하게 되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다크호스로 등장한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그들의 자리를 차지하기 전까지 일이다.
‘왈츠의 아버지’란 아버지의 명성보다 더 높은 ‘왈츠의 왕’이 된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그 명성에 걸맞게 수없이 많은 왈츠의 걸작을 남기며 빈을 더욱 춤추게 만들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왈츠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19세기 초 오스트리아 빈에 왜 춤판이 벌어졌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당시 혼란스러웠던 사회, 정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1814년 오스트리아 빈에서는 앞으로 유럽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회의가 한창이었다. 온 유럽을 혼란으로 몰고 간 프랑스 혁명의 기운과 나폴레옹이 마구 헝클어 놓은 유럽의 지도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빈의 재상 메테르니히의 주도 아래 열린 이 회의는 겉으로는 평화회의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각국이 영토를 어떻게 나눠 먹을 것인가와 서로 간의 이익으로 대립하고 있었다. 절충은 쉽지 않았고, 회의는 난관에 부딪히기 일쑤였다.
그래서 이 냉랭한 분위기를 바꿔 보고자 무도회를 열었던 것이다. 그런데 화려한 무도회에 도취된 참석자들은 회의는 뒷전이었고 사교와 춤에만 열중했다. 회의는 제자리걸음인 가운데 무도회는 나날이 화려하게 변해갔다. 당시 언론은 ‘빈 회의는 춤만 춘다’며 비아냥거렸고, 이 빈 회의의 왈츠의 물결은 결국 빈 시내마저 뒤덮어 버린 것이다. 이때부터 빈 시내에는 연간 700여 회의 무도회가 열리게 된다.
정승용 작곡가ㆍ지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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