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들이 좋아하는 TV 교양프로그램의 <삼국지> ‘조조’ 편에서, 이 시대는 유학(儒學)의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 거세된 상태라는 취지의 언급이 있었다. 유학이 인격과 권력의 도덕화를 지향하지만, 신분사회의 산물이며 개인의 개성과 자유에 별 관심이 없고 남성중심의 시각에서 성차(性差)를 차별로 이끌기 쉬우며 솔선수범을 부각하지만, 권위와 서열을 중시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또 유학을 역성혁명의 명분으로 내건 조선의 500년 왕정이 실제 그러지 못했으며 후기에는 기득집단의 교조주의로 고착돼 근대를 지향하는 다른 학문과 사상을 억압했다. 두 외척가문의 세도정치를 야기하고 민중의 정당한 봉기를 민란으로 규정하는 틀이었다가, 결국 나라를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했다는 사실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 오류와 귀결이 유학의 그 가치 때문이었는가?
아니다. 그 가치를 정치와 일상에서 제대로 실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명분으로 삼고 실제로는 그 역행(逆行)과 악용(惡用)을 일삼은 위선(僞善) 세력 때문이었다. 역설이 아니면서도 역설인 이 문제가 진실이며 유학의 한계라면 한계요, 죄라면 죄다.
1910년 망국에 직면하자 막심한 피해자였는데도 오히려 역사와 민중에게 자결로 사죄한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 : 1842-1910)와 매천(梅泉) 황현(黃玹 : 1855-1910) 등의 염치에서도 우리는 유학의 진짜 실천을 보며 감동에 젖는다.
공자는 유학 가치의 실현에서 위선을 우려하며 ‘정명(正名)’을 강조했다. 정명은 명분과 실제의 일치를 거듭 강조한다. 사람은 각자 자신의 위치와 직능에 그 이름대로 충실해야 삶에 진정성이 있고, 국가와 가정의 안정과 발전도 기약할 수 있다는 논리며, 그 일치를 이루는 소양은 역시 인의예지신이었다.
오늘 우리 사회에 비리와 범죄가 연속 발생하고 있다. 제어하고 징벌하는 제도와 법이 없어서인가. 악당을 능가하는 계략으로 악당을 제압해도 악당이다. 그리하여 유학의 오랜 주장, 유학의 그 가치들이 제도와 법과 융합해 질서를 형성해야 보다 나은 인본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신념을 수용할 필요가 있다. 이 시대의 화두인 공정도 인의 없이는 불가능하다. 통합과 복지 확대도 그렇다. 왕조시대에 유학 선비들은 힘이 없었지만, 이 시대의 시민들은 권력의 폭력에도 더 이상 속수무책이 아니다.
자신의 개성과 욕망을 분출하며 운명을 결정하는 시대, 과학과 기술과 경제와 매니지먼트가 세상을 유력하게 이끄는 시대, 4차산업과 AI가 대두되는 시대일수록, 사회와 관련된 개인의 수신(修身)을 강조하면서 시공을 초월하는 보편 휴머니티를 우리 청년들이 추구하게 하려면, 유학의 인의예지신을 그 텍스트로 제공하는 배려가 가장 적합하고 효율성도 높지 않겠는가.
다만 유학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비판되면서 인의예지신 구현도 그 조건과 의의가 조정돼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도 마르크시즘도 예외가 아니었으며 페미니즘과 국제사회를 또 동요시키는 시오니즘도 마찬가지다. 오늘의 삶에 관류하는 다른 가치들과 어울리면서 일상에서 그 실천이 가능한 행동양식(樣式)들이 무엇인지, 이 시대의 유학자들과 관련 기관들이 앞으로 더 활발하게 제안을 지속하기를 기대한다.
김승종 연성대 교수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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