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간은 역대로 재난을 겪으며 삶의 한계를 인식하곤 하였다. 하지만 미물은 경악만 하지 않았다. 자타의 불행에 공포와 연민에 시달리며 그 개선을 거듭하였다. 비극 관람에서만 카타르시스가 있지 않았다. 재난은 종교와 과학의 형성에 일조하였고, 정치와 권력의 전개에서 주요 모티프가 되었다. 어쩔 수 없을 수도 있다고 여겼던 천재(天災)는 과학과 기술로 오늘날 기대 이상의 제어가 가능한데, 노력하고 각성하면 예방할 수 있을 수 있다고 여겼던 인재(人災)는 형태를 달리하며 별 개선 없이 반복되고 있다. 이 역시 우리가 매번 성찰해온 아이러니이며 그 환골탈태 시도에도 자신이 없는 듯하다.
최근 광주(光州)에서 야기된 건물 붕괴는 우리를 다시 비애로 사무치게 하였다. 처참하게 돌진하듯 무너져 내리는 시멘트, 순식간에 사라지는 버스, 자욱한 먼지에 묻힌 비명. 대체 언제까지 우리는 이런 무도한 참사를 겪어야 하나. 또 불법하도급 등 원인과 안전관리 강화방안이 언급되었다. 하지만 이 인재의 저변에 도사린 원흉은 그것들이 아니다. ‘부당이득 도점(盜占)과 강점(强占)’이란 사실을 우리는 안다. 부정한 돈의 개재가 의심스런 가운데, 마땅히 들여야 하는 기초비용까지 줄이고 감행한 이욕의 연쇄가 야기한 인재. 그래서 사고 사건이라고 하기 어렵고, 굴착기 기사 구속? 그는 한 희생양에 불과하다. 2014세월호 참사가 그 선사(船社)와 우리 사회의 가슴에 천민자본주의의 주홍글씨 ‘A’를 각인하였으나 그러고도 같은 성격의 인재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2016구의역스크린도어참사, 2018태안화력발전소참사, 2020이천물류창고건설현장폭발참사, 지난 4월 평택항컨테이너참사 등등. 중복되지만 근본문제를 분명히 하자. 참사들의 발생에 여러 요인이 있지만, 무엇보다 ‘부당이득’을 챙기는 인간의 무리한 욕심이 그 복마전의 주인이다.
‘중대재해처벌법’이 내년 1월 27일부터 시행되더라도 이런 사건은 계속 일어날 것이다. 그렇더라도 그럴수록 우리는 삶을 사랑하고 책임지는 도리로 그 예방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정부와 국회는 지금이라도 그런 비리를 우리 사회의 ‘기본 적폐’라고 문제시하고, 내년 대선에 매이지 말고 다각도로 그 ‘청산’에 나서기 바란다. 이 청산에 여야와 진보 보수가 따로 없고, 아무리 빨리 해결하여도 빠르지 않으며, 아무리 늦어도 늦지 않지 않은가. ‘중대재해처벌법’도 살펴 보완하고, 관련된 각종 악착 기생(寄生) 비리를 모조리 근절하는 후속대책을 강구해 시행하기 바란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법제만으로는 과도하고 부당한 이욕에서 야기되는 인재를 모두 예방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리하여 우리는 고개를 흔들고 자신을 성찰하며 절제의 미덕으로 자신을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고 만다. 우리는 자신의 욕망을 경청하면서도 경계하여야 한다. 실패하기 쉽고 새삼스러우며, 위선과 자기기만이 될 수도 있는 이 토로가 지겹기도 하고 각성을 일으키기도 한다. 우리는 결국 자신에게 도전하는 용기가 계속 필요할 것이다. 알베르 카뮈는 『시시포스의 신화』에서 그 좌절과 도전의 반복을 아예 ‘인간 삶의 실존적 부조리’라고 지칭하며 용기를 북돋는다.
김승종 연성대 교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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