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바이올리니스트 S씨의 리사이틀에 참석했다. 정성껏 준비한 멋진 프로그램의 감동적인 연주를 감상하며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유대계 바이올리니스트 핀커스 주커만(73)이다. 그는 “한국인 DNA에 예술성 없다”라는 충격적 발언으로 논란이 된 인물이다.
한 개인의 음악적 표현은 복합적인 문화적 습성에 따른 전통에서 시작된다. 이를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예술에 대한 예의다. 주커만의 “동양계 연주자들에겐 노래 DNA가 없다” 발언은 다양성의 무시에서 생겼다.
동양인들은 지나친 표현을 절제하는 문화 속에서 성장해 왔다. 그것은 다른 민족이 가질 수 없는 매력적인 소통방법 중 하나다. 피부색에 따라 음악의 우월성을 비교하는 것은 삐뚤어진 시각을 가진 자들의 의견에 불과하다. 이번 사건의 중심지인 미국에선 형식적으로는 인종, 성별, 연령을 차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은연 중 가지고 있는 인종차별적 의견을 발설할 때는 이어지는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
꽤 오래전부터 미국 음악시장 주류는 유대계 출신이 리드하고 있다. 근래 들어선 뉴욕과 미국 동부 음대 학생들은 동양계가 주류를 이룬다. 세계콩쿠르에서 아시아 출신 연주자들이 대거 상위 입상을 하고 있다. 유대계 연주자들은 이전에 비해 눈에 띄지 않는다. 커다란 변화다.
한국의 연주자 양성을 위한 조기교육의 훈련방법은 때로는 혹독하다. 반복적인 훈련으로 기술적 수준은 오르겠지만 음악의 깊은 느낌을 전달하는 부분에서 미흡할 수 있다. 이는 노래가 실리는 예술성을 기본기가 성숙된 후 자연스럽게 따라오도록 하는 훈련방법일 수도 있다. 미국에서도 이런 방식의 훈련을 시키는 유대계 선생들을 많이 봤다.
미국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지휘과 지원생들의 출신국과 예술성을 조합해 보면 각양각색이다. 일정 공식을 산출할 수 없다. 유대계 학생을 차별한 적이 결코 없다는 전제로 돌아보면 유대계 지원자가 최종 합격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동양계 학생들이 우월한 예술성을 발휘한 경우가 많다. 악기를 다루는 유대계 학생들도 기술적으로만 우수한 것에 만족해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유대인들도 우리와 같이 나라를 잃고 박해를 받으며 생존을 위해 버텨온 처절한 표현이 그들의 음악속에 있다. 그들은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애환이 실린 방법으로 다르게 노래할 뿐이다.
주커만이 공개적으로 발설한 동양계 음악인에 대한 선입견을 통렬하게 뉘우치고 오류를 전향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교육계에서의 활동과 수입은 포기하고 혹독한 연습을 통해 전성기 기량을 가진 연주자의 길로 매진하는 것이 현명하다. 무대에서 악기만으로 모든 것을 표현하는 연주자와 달리 교육자는 인성, 사랑, 끝없는 인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끝으로, S씨와 같은 한국 음악가의 연주에 참석해 편견을 깨트리는 행운을 갖기를 바란다.
함신익 지휘자ㆍ심포니 송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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