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의 세계적인 대유행으로 1년을 미루다가 가까스로 열린 2020 도쿄 하계올림픽이 10여일 전 막을 내렸다. 올림픽에서 감동을 준 많은 선수에게 감사와 격려의 마음을 전한다. 쿠베르탱에 의해 시작된 근대올림픽의 정신은 ‘스포츠를 통해서 심신을 향상시키고 문화와 국적 등 다양한 차이를 극복하며 우정, 연대감, 페어플레이 정신을 가지고 평화롭고 더 나은 세계의 실현에 공헌하는 것’이라 한다. 이번 올림픽을 통해서도 우리 인류가 평화로운 세계로 한 걸음 더 나아갔길 기대한다.
나는 붓다가 꿈꾼 평화로운 세계를 생각해 본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고통을 여의고 즐겁게 사는 세계를 꿈꾼 것 같다. 붓다가 이룬 정신 경계는 니르바나(Nirvana), 즉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마음의 평화에 다름 아니다. 붓다가 이룬 마음의 평화로부터 스스로 어떤 폭력도 없는(Ahims) 자비로운 상태가 됐다. 모든 인류가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된다면, 어떤 종류의 전쟁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모든 인류가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되지 못한다면, 전쟁을 완전히 없애기는 어려울 것이다. 인류 역사 전체를 보면 전쟁이 없는 시기가 없었다. 붓다가 살았던 시대도 인도가 16개 국가 간에 정복전쟁을 통해 마가다국에로 통일돼 가는 시기였다. 붓다가 겪은 세상도 그렇게 어둠이 짙은 시대였다. 그런데 붓다의 모습은 따라하기가 어렵고 남다르다.
증일아함 ‘등견품’에 따르면, 붓다는 자신의 고향인 카필라성을 무저항과 비폭력으로 지키려고 했다. 붓다의 10대 제자 중 한 사람인 신통제일 목건련(目健連)은 무력으로 지킬 것을 붓다에게 건의했다. 붓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붓다가 한 일은 여러 차례 침략해온 코살라국 유리왕(流離王) 일행이 침략해오는 길목에서 크고 무성한 나무 그늘 대신 마른 나무 아래서 그저 뙤약볕을 맞으며 앉아서 명상수행을 할 뿐이었다. 붓다는 은유적이며 평화적인 방법으로 자기 뜻을 밝혔다. 유리왕도 이를 알아차렸고 성자를 무시할 수 없어 발길을 돌렸다.
그렇지만 결국 그는 그 길을 지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어렸을 때 카필라성 방문에서 겪은 수모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을 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당시 정복전쟁 시대 속에 있었던 왕으로서 전쟁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결국 코살라국의 유리왕에 의해 카필라성은 망했다. 그리고 이 성에 살았던 붓다의 고향 사람들은 무참하게 짓밟혔다.
불교의 초기경전에서는 붓다의 전쟁에 대한 위의 태도가 반영된 불살생과 비폭력을 제1원칙으로 삼는다. 다만, 일부 경전에서는 정법이 실현되는 불국토 수호를 위한 부득이한 방어전쟁을 허용한다. 재가 신도들에 한해 전쟁 참여를 허용하고 승려가 이들과 친구 되는 것도 가능하다. 살생을 허용하지 않는 불교계율과 부득이한 방어전쟁을 하다가 부득이하게 이뤄지는 살생 사이에는 공통의 전제가 있다. 그 전제는 ‘내면의 평정심’이다. 피할 수 없어 싸우게 되더라도 ‘고요한 마음’을 잃으면 안 된다.
김원명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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