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호계서원

2019년에 유네스코가 한국의 아홉 서원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하고 보존과 활용에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있다고 선언했다. 서원 발생과 존립 근거는 ‘존현양사(尊賢養士)’, 시대를 초월해 존중해야 할 이념이다. 1541년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 창설된 이래 전국에 들어선 서원들은 훼손된 유학의 가치 복원에 기여했다. 그런데 18세기 이래 많은 서원들이 통속화되면서 당쟁과 민폐의 소굴이 됐고, 1871년에 대원군 정부는 47개 서원만 남겼다.

지난해 경상북도와 안동시는 양사의 기풍까지 현대화한다는 비전으로 명맥만 잇던 호계서원(虎溪書院: 주향 퇴계 이황, 배향 서애 류성룡, 학봉 김성일)을 도산면 국학진흥원 근처 산록에 중건하고 고유했다(대산 이상정 추가 배향). 천민자본주의가 득세하고 조잡한 정치와 인격들이 세상을 조롱하듯 어지럽히는 이 시대에 유학의 기개와 절제를 어느 정도 회복해야 한다는 의사를 비원처럼 품고 있던 사람들은 크게 고무됐다. 게다가 호계서원은 독립운동 유공 서원이기도 하다. 1907년에 만원 김병식, 동산(東山) 류인식, 석주(石洲) 이상룡, 일송(一松) 김동삼 등 안동의 혁신유림이 교육구국의 일환으로 협동학교(協同學校)를 세우며 호계서원의 재산 대부분을 재원으로 활용했다. 이후 피폐해진 호계서원은 시대의 요구에 과감하게 헌신한 나머지 영광스러운 남루였고, 협동학교의 기맥은 만주의 신흥무관학교로 계승된다.

천만 뜻밖에도 며칠 전에 퇴계 이황 선생의 위패가 철수됐다고 한다. 참담한 심정으로 실색하지 않을 수 없는데, 공사 구분이 결여된 공인될 수 없는 처사다. 서원의 위패는 문중의 위패가 아니다. 적어도 시민들에게 여부를 묻는 절차를 거친 서원운영위의 의결이 있어야 한다. 또 위패 철수 이유들도 하나를 제외하고는 무미해 차라리 잘못 들은 것으로 하겠다. 그 하나는 네 분의 위패를 동쪽에서 서쪽으로 일렬 배치해서 사제(師弟)의 위상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 했다는 주장이다. 일렬 배치에도 서열이 있고(동쪽 즉, 왼쪽부터 상위) 퇴계의 독자 위상을 양보해 지난 병호시비(서애와 학봉의 동서 위차)를 중창과 더불어 희석시키겠다는 깊은 선의와 겸양의 의의가 내포돼 있다. 그런데 일부 인사들이 퇴계가 제자와 후대 제자와 같은 반열에 놓였지 않았느냐고 굳이 문제제기했다면 운영위는 그 주장을 종내에는 수용했어야 했다. 이제라도 옛 방식대로 조정해 200여년 만의 화합 기회와 미래지향 대사를 그르치지 말기를 기원한다. 퇴계 선생에게 그런 사유로 위패를 철수하겠다고 고유했다면 고개를 돌렸을 것이고, 위패 배치 위 두 방안을 묻는다면 겸퇴의 선생은 다 괜찮다며 미소 지을 것으로 추정한다. 또 수습 과정에서 시민들의 여론에 따라 관련 선현들을 추가 배향해 존현 기능을 확대할 수도 있다. 만약 달보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우선해 호계서원을 오히려 이전보다도 못한 상태로 방치하고, 또 의도와 무관하지만 결국 퇴계 선생까지 병호시비 확대에 연루시키는 사태를 지속시킨다면, 당사자들은 선현들과 선열들에게 무책임하며 긴 광음을 회귀해 도래한 유학과 서원 관련 시대의 요구를 외면한다는 비판에 직면할 것이다.

김승종 연성대 교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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