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 모집 앞장 김병희·김교상 父子...독립군 소위로 활약한 계기화 지사
기록 부족… 국가의 외면 속 빛 못봐, 후손들 “명예 찾아드리고 싶어” 호소
삼일절. 해마다 이날이면 가슴이 찢어지는 시민들이 있다. 정부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다. 광복을 부르짖던 지사들의 외침은 국가의 외면 속에 희미해지고 있다. 선친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궁핍한 삶을 살아야 했던 후손들에겐 지금 돈도, 명예도 남지 않았다. 마음 한 켠 고이 간직해왔던 자부심마저 국가의 외면 속에 초라해지고 있다. 경기일보는 인정받지 못한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이야기를 통해 책임을 방기하고 있는 국가의 현주소를 조명하고 대책을 촉구한다. 편집자주
“일본 기록에 나오는데도 왜 나라에서는 인정해주지 않는건지, 살아생전 두 분의 명예를 찾아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나라를 지키다 한날한시 세상을 떠난 부자(父子) 지사 김병희(金柄熙·1851∼1908)·김교상(金敎相·1872∼1908)의 후손 김중경씨는 아흔이 넘은 몸으로 할아버지와 큰아버지의 포상을 신청했다가 화병까지 얻었다.
이들 부자는 경상남도 양산의 거부로 동향인 서병희 열사의 의병부대를 지원하는 데 앞장섰다. 눈 감고, 고개를 돌리면 그만이지만, 이들은 일제의 만행을 두고 보지 않았다. 당시 2천석의 쌀값인 거금 5천원을 지원했고, 직접 의병을 모집해 일본군과의 격전을 치르기도 했다. 그러던 부자는 이틀 간격으로 일본군에 붙잡혀 양산시장에서 모진 고초를 겪다 숨을 거뒀다.
이들의 활동은 일본군의 체포기록에도 명확히 나온다. 그런데도 국가보훈처는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의 포상 신청을 거절했다. 체포한 날짜는 있지만, 언제 형을 집행했는지의 날짜는 없다는 게 이유다. 당시의 상황 속에 일본군이 언제 의병을 처단했다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로 우리의 미래를 위해 싸워온 부자의 역사는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조선혁명군의 총사령관이던 양세봉 열사와 함께 독립군 소위로 활약한 계기화(桂基華) 지사는 2002년 82세의 나이로 작고한 항일운동사의 역사적인 인물이다. 1932년 통화현 군관학교를 거쳐 한국인과 중국인 혼성부대인 요녕민중자위군에 참여해 일본군과 맞섰고, 특히 양세봉 열사가 이끈 조선혁명군에 참여해 중상을 입기도 했다. 그는 이후 자신의 삶과 독립군에 대한 내용을 정리하고 기록해 남겼다. 늦은 나이에 결혼한 계 지사의 고명딸이 이를 발견했다. 독립운동사연구소가 1년여간의 연구를 거쳐 계 지사의 포상을 신청했을 때, 받아들여지지 않으리라 의심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미 그가 남긴 기록물에 대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았고, 독립기념관에서 2020년 열린 독립전쟁 100주년 특별기획전 ‘나는 독립군입니다’에도 계 지사의 이름이 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라를 위해 온 몸이 부서져라 싸우다 입은 부상으로 평생을 고통받은 계 지사의 업적은 아직도 나라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독립운동사연구소는 이날까지 3천500여명의 독립운동가 등을 발굴해 포상을 신청했다. 이들 중 신청이 받아들여진 이는 250여명에 그친다.
이태룡 독립운동사연구소 박사는 “포상업무 자체가 국가보훈처 직원들이 감당하기에는 방대한 양인데다 기준 자체가 너무 까다롭다”며 “이런 분들을 위해서라도 정부가 먼저 나서 발굴하고, 포상 심사위원회의 인력도 확대해야 한다”고 했다.
김경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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