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으로 모인 주민에게 '공론장' 제공 주민들이 직접 설계하는 '우리 동네 생활문화'
부천 역곡역 1번 출구에서 번화가를 따라가다 보면 아파트 몇 개 동이 자리한 인근에 역곡문화의집이 보인다. 지난 11월8일 이 곳 출입문 앞엔 인근 네온사인처럼 번쩍이는 특별한 포장마차가 세워졌다. 이름은 ‘라면수다 포차’. ‘누구나 오세요! 라면을 드려요!’ 라고 적힌 문구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혹했다. 이날 열린 라면수다 포차는 한국문화의집협회가 경기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협회 경기지회와 함께 진행한 ‘2022년 경기권역 문화의집 생활문화 플랫폼’ 사업 프로그램 중 하나다. 퇴근하고 나서, 하루 일과를 마치고서 본인들의 문화나 삶 속의 고민을 누군가와 함께 하고 나누자는 취지로 마련된 행사에선 라면처럼 보편적이면서도 저마다의 개별적인 이야기와 공감이 주민들에게 특별한 저녁을 선사했다.
‘라면수다 포차’는 일상이 끝난 저녁, 서로의 고민을 터 놓고 이야기하며 이웃들과 문화의집 포차에서 위로와 공감을 나누는 형태로 마련됐다. 주민들이 편안하게 들러 이야기하는 공론장을 만들어준다는 데 의미가 있다. 내 주변과 타인과의 활동이나 참여에 ‘한 발짝’을 내딛기 어려운 이들을 위한 부담없는 무언가가 이뤄져야 한다는 최수진 역곡문화의집 대표(한국문화의집협회 경기지회장)의 의지가 반영됐다. 그래서인지 최 대표는 라면포차가 “프로그램이 아닌 프로젝트”라고 강조했다.
주뼛주뼛 역곡문화의집 내부를 들여다보던 주민들은 “들어오세요, 라면 드시고 가세요”라고 외치는 최 대표와 관계자들의 환대에 이내 자신있게 들어섰다. 참여자들은 본격적인 행사가 시작되기 전에 잘 익은 김치와 어묵, 햄, 종류별로 올려진 라면을 각자 취향대로 골라 라면을 끓이기 시작했다. 이어 첫 번째 미션, 끓인 음식에 이름 짓기가 시작됐다. ‘모둠라면’부터 미리 몰래 먹어서 ‘몰래라면’, 함께 모여 ‘즐거운 라면’, ‘짬뽕라면’, ‘문화의집 라면’까지 다양한 이름이 붙여졌다. 자기소개가 시작되자 엄마 손을 잡고 온 학생부터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고 두 자녀까지 출가시킨 후 혼자 삶을 즐기는 어르신, 문화의집 윗집 아코디언 학원 원장님, 근처 커피숍 사장님까지 저마다 각자의 소개와 사연을 털어놨다. 소개는 저마다 달랐으나 공통적인 말이 있었다. “33년 살았는데 여기 처음 들어와본다”, “들어오고 싶었는데 매번 못 오고 오늘 들어와 봤다”. 생면부지 사람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라면을 끓어먹고 미션을 이어가면서 어색함은 가벼운 즐거움으로 바뀌었다.
처음 만난 주민들은 연령대, 서로 처한 상황, 직업 모두 달랐지만 저마다의 색이 담긴 공감과 대화를 건넸다. “삶의 즐거움이 없다”라고 말하는 한 아주머니에게 반대편 테이블에 앉은 남성은 “즐거움은 자기가 만드는거다. 남이 만들어주지 않는다”라며 달랬고, 올해 나이 예순이라고 밝힌 한 주민은 “마누라도 보내고 보름 전 두 아들이 독립했다. 날 때도 혼자 온 것 처럼 갈 때도 혼자 가는 거다. 지금을 즐기고 싶다”고 말했다. ‘사랑과 문학이 만난다’, ‘인생 출발점’, ‘서로 어울리는 것’ 등 문화 플랫폼에 대한 정의도 쏟아져 나왔다. 이어 관심사는 이 일이 벌어지는 역곡문화의집으로 옮겨져 “여기 뭐하는 곳이냐”, “언제 오면 되느냐?”등의 문답이 오갔다.
차려놓은 프로그램에 주민이 오는 게 아니라 주민이 들어와 함께 프로그램을 설계하는 게 목표이다보니 어떻게 흘러갈지, 어떤 담론이 나올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일상의 대화에서 자연스럽게 주변과 이웃, 동네의 문화와 분위기가 담겼다.
의도치 않게 생활문화 설계자로 참여하게 된 주민들은 내가 사는 동네에서 어떤 활동이 펼쳐지고 어떤 교류를 할 수 있는지 체험하는 시간이었다고 평했다. 박희용씨(60)는 “그동안 이 곳에서 북도 장구도 가르쳐 준다길래 가고 싶었지만 선뜻 용기가 나질 않아 가지 못했다. 오늘 가보니 주민과 어울리는 공간인 듯 했다. 주민과 저녁에 이런저런 일상을 나누니 그 자체로 문화의 경험이고, 좋았다”고 말했다. 인근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최영기씨(60)는 “나이 들어 새로운 만남이나 놀이를 하기 어려운데, 동네에 이런 일들이 자주 벌어졌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최 대표는 “문화는 작게작게 살아나야 하는데 이 동네에서 저거 하니 좋다, 저것도 좋다 등 다 모방을 하면서 결국 똑같아진다. 살아있는 문화는 내 눈높이에서 하는 것이다. 이번 사업을 통해 우리 동네, 주민만의 문화 담론을 찾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인터뷰 장은진 한국문화의집협회 일상사색팀장
Q. 이번 경기권역 문화의집 생활문화플랫폼 사업을 통해 기대하는 효과가 있다면.
A. 올해 협회는 경기권역 문화의집 생활문화플랫폼을 통해 경기권역 문화의집 9곳을 대상으로 문화의집형 생활문화플랫폼 시범사업과 문화의집 운영자 역량강화 교육을 이어갔다. 문화의집 주민들과 생활문화 활동을 실험하고, 지역의 다른 문화공간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동네 속 생활문화플랫폼을 만들어간다는 취지다. 핵심은 생활문화 플랫폼 사업을 ‘주민이 함께 설계하는 생활문화’이다. 실제 여기서 나온 의제를 모아 문화의집에서 앞으로 할 활동을 이어나갈 예정이다. 이런 사업을 통해 한층 더 단단한 생활문화 플랫폼이 구축될 것으로 기대한다.
Q. 역곡문화의집에서 ‘라면수다 포차’가 진행된 계기가 궁금하다.
A. 누구나 부담없는 라면을 공통의 주제로 놓고 그 안에서 주민들이 참여해 그 안에서 의제가 나오도록, 주민이 주도하는 방식을 시도했다. 누구나 모여 편안하게 부담없이 일상의 문화를 즐기도록 한 취지는 역곡문화의집 태생과도 닮았다. 역곡문화의집은 지자체 조례 없이 문화의 집 활동만을 위해 처음 만들어진 최초의 민간 문화의집이다. 주민공동체가 무언가를 함께 해보자라고 해서 소극장에서 출발해 모두가 공유하는 쉐어 형태로 문을 열었다.
Q. 생활문화 활성화와 문화의집 목표와 과제는 결국 맞닿는 지점인 것 같다.
A. 우리 동네에서 슬리퍼 신고 갈 수 있는 문화시설, 일상과 동네 문화를 만들어가는 삶의 문화 발신지라는 부문에서 그렇다.
그중에서도 여기 역곡은 생활문화를 내 삶 속에서 누리고 문화적 삶을 실현할 수 있는 장소를 표방한다. 동네 주민들의 관계를 잘 만들어주고 이끌어주고, 나에게서 파생된 생각이나 고민을 함께 할 수 있게 해 주민들이 편안하게 찾는다. 이런 작은 생활문화가 이 동네 저 동네에서 많이 되살아나야 한다고 본다.
정자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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