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녘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면도날처럼 날카로웠다. 동장군의 심술이 잔뜩 묻어 있었다.
평택시 고덕면 두릉리 646번지 게루지 마을. 이곳을 찾은 건 2006년 1월 하순이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정국을 헤쳐간 민세 안재홍(民世 安在鴻·1891~1965) 선생의 생가를 찾는 발길이었다. 필자는 그때 “가슴이 설렜다”고 썼다.
지난한 독립투쟁을 거쳐 광복을 맞았지만 6·25전쟁 때 납북된 뒤 북녘에서 별세했다. 해방정국에선 미군정 민정장관, 제2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하며 중도우파적 입장에서 근대국가 수립을 주창했다. 언론인, 민족사학자, 독립운동가, 정치인 등 여러 호칭이 따라붙었다.
민세 선생은 독립운동가였지만 각별히 우리말을 사랑한 지식인이기도 했다. 누구보다도 우리말을 아꼈다. 특히 그가 애지중지하던 단어는 ‘다사리’였다. 그는 생전에 “‘다사리’는 우주의 엄정한 질서와 운행법칙을 모델로 하는 인간사회의 정치이념이자 단군 이래 우리 민족의 정치적 이상”이라고 강조했다.
‘다사리’는 ‘모두 다 말(씀)하게 하여’나 ‘다 사리운다’와 같은 뿌리에서 ‘진백’(盡白)이나 ‘진생’(盡生) 등을 뜻한다. 진백은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민주주의, 진생은 공동체 모두를 골고루 잘살게 해주는 사회복지로 서양 정치사상의 두 가지 흐름인 자유주의와 평등주의 등으로 귀결된다. 모두가 골고루 자유롭고 넉넉한 개념을 담고 있는 어휘인 셈이었다.
민세 선생이 평생 펼쳤던 사상은 다사리 민족주의였다. 그래서 그가 건국하려던 나라도 반쪽 독립이 아닌 완전한 독립이었다.
공교롭게도 그의 고향인 평택의 한자 ‘平澤’을 순수한 우리말로 표현하면 다사리가 된다. 만약 그가 납북되지 않고 계속 활동했다면 ‘仁川’의 옛 지명 ‘미추홀’이나 ‘大田’의 우리말 ‘한밭’ 등처럼 ‘平澤’이란 지명도 ‘다사리’로 바뀌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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