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우계 성혼 선생

성현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우(祠宇)와 교육을 담당하는 서재(書齋) 등으로 나눠 운영됐다. 총장격인 훈장(訓長)이 있었고 학생회장은 장의(掌議)라고 불렀다. 학생들은 ‘소학’부터 시작해 사서와 오경을 중심으로 학문 연마에 전념했다.

 

조선시대 낙향한 사대부들이 설립했던 서원(書院) 얘기다. 요즘으로 치면 지방 국립대인 향교와 어깨를 나란히 하던 지방 사립대였다. 물론 조선 후기로 갈수록 폐단도 있었다.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지만 부정적인 면도 있었던 게 역사의 현실이다.

 

파주시 파평면에도 파산서원이 있었다. 우계 성혼(牛溪 成渾·1535~1598) 선생이 설립했다. 우계 선생은 동국18현 중 한 분으로 올곧은 선비였다. 조광조 선생의 제자인 백인걸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이때 율곡 이이 선생을 만나 평생의 친구로 지냈다. 율곡 선생의 추천으로 벼슬길에도 나갔다. 절친한 친구였지만 학문적인 측면에선 견해가 갈렸다.

 

이런 가운데 최근 파산서원 정문 앞 수령 300여년의 느티나무 고사목(경기일보 4월21일자 10면)이 우계 선생의 서당인 우계서실 편액으로 재탄생했다. 96년 만이다. 앞서 해당 느티나무 고사목은 지난해 비바람으로 쓰러져 방치됐었다.

 

윤증 선생의 저서 ‘우계서실중수기’에 따르면 우계 선생 후손이 1673년 우계 선생이 직접 적은 우계서실 현판 글씨를 찾아내 판액으로 판각했지만 1927년 방화로 불에 탔다. 이후 후손들이 이를 모각해 우계서실 인근 귀퉁이에 유허비를 세웠다. 파주문화원 등은 해당 유허비를 탁본해 파주시가 인수한 고사목을 성금을 모아 우계서실 편액을 만들었다.

 

파주는 우계 선생의 문향(文鄕)이다. 그가 40대 초반에 지은 시조가 귓가를 맴돈다. “말 없는 청산이요 태 없는 유수로다/값 없는 청풍이요 임자 없는 명월이라/병 없는 이내 몸도 분별없이 늙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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