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26일 토론회

“죽산의 인천에서의 경험, 해방 이후 정치적 행보에 영향”

인천 남동구 구월동 인천시청에서 열린 죽산 조봉암 사진전에서 한 시민이 관람을 하고 있는 모습. 경기일보DB

 

죽산 조봉암 선생의 인천에서의 9년간의 지역사회 경험이 해방 이후 조봉암 선생의 정치적 활동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는 26일 오후 2시 인천 YWCA에서 ‘조봉암의 인천지역 활동 연구 1939~1948년’에 대한 토론을 했다. 조봉암 선생이 9년 동안 정착한 인천에서의 활동에 대한 고찰과 대한민국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토론했다.

 

이날 정계향 울산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연구교수는 “중앙정치 무대에서 조봉암이 두각을 드러내는 것이 가능했던 것은 해방 공간인 인천에서의 왕성한 활동 덕분”이라고 밝혔다. 이어 “조봉암의 일대기에 인천에 대한 이해 없이는 반쪽짜리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정 교수는 일제 말기 조봉암 선생의 인천 정착 과정 및 지역에서의 위치, 역할 등을 분석하기도 했다. 그는 “인천은 일찍부터 개항하면서 일본인이 대거 이주했고, 일제강점기 내내 발전을 거듭해왔다”고 말했다. 이어 “인천을 기반으로 성장하고 활동한 이들이 지역 사회의 여론을 주도하고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조봉암은 인천에 정착해 처음으로 지역 주민으로 살았다”며 “이 경험은 해방 이후 조봉암의 정치적 행보에 어떤 방식으로든지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다”고 강조했다.

 

앞서 조봉암 선생은 인천 강화군에서 태어나 서울·도쿄·모스크바·상하이 등지를 다니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1932년 상하이에서 체포, 7년간 수감생활을 마치고 1939년부터 9년 동안 인천에 정착해 활동했다. 조봉암 선생은 1948년 5·10 총선거에서 제헌 의원으로 뽑히며 인천을 떠났다. 그 뒤 초대 농림부장관을 맡아 농지개혁을 주도했고 1950년에는 국회 부의장에 올랐다. 그가 주도한 농지개혁은 훗날 우리나라 산업화의 초석으로 자리매김 했다.

 

한편, 이날 토론회에는 김대영 인천시의원(더불어민주당·비례), 김창수 문화평론가, 양윤모 ㈔개항장연구소 연구위원, 이준한 인천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정인오 작가 등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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