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단체 후원·학생 봉사활동 줄어...급식소 지자체 지원 없이 운영 빠듯
노인빈곤 시대 ‘무료급식소 천사들’
대한민국의 노인빈곤율은 OECD 국가 중 1위다. 힘든 상황에 내몰린 노인들이 찾는 곳은 무료 급식소다. 그곳엔 노인을 돕는 노인들이 있다. ‘나보다 우리’를 생각하며 ‘빨간 장갑’을 끼고 봉사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편집자주
매서운 한파가 몰아친 지난 19일, 수원특례시 팔달구에 위치한 노인복지관에는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무료 급식소를 찾는 이들이 하나둘 줄을 서기 시작했다.
‘노인빈곤율 1위’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여주려는 듯 힘겨운 삶으로 인해 얼굴 곳곳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지만, 밥 한 덩이에 행복해하는 모습이 묘한 대비를 이뤘다.
근처에 산다는 변모씨(82)는 “집에 혼자 있기 심심하고 그래서 여기 와서 밥 한 끼 먹으려고 한다”고 말했다.
유모씨(76)는 “여기 다닌지 2달 됐고, 매주 3회씩 꼬박꼬박 방문하고 있다. 무료 급식소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받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먹을 수 있어 감사하다”며 환한 얼굴로 인사를 전했다.
무료 급식 봉사자들이 빨간 장갑을 끼고 기자들을 반겼다. 급식을 총괄하는 이모 영양사는 “(무료 급식소는) 위생이 제일 중요하다. 음식 준비 전에는 빨간 장갑을, 음식을 만들거나 배식할 때는 위생장갑을 착용한다”고 설명했다.
눈에 띄는 것은 급식소에서 봉사하는 이들 역시 노인이란 점이다. 급식 봉사만 18년을 했다는 권윤순씨(85). 권씨는 “오시는 분들이 다 내 처지 같아서 안 나올 수가 없더라”며 “아무도 없는 집보다 (복지관에) 나와서 서로 안부를 묻고 이야기하는 게 아직 살아있다는, 또 사회 구성원이라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고 말했다.
권씨를 포함 십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의 평균 나이는 75세다. 권씨와 같은 마음으로 무료 급식소를 찾아 ‘빨간 장갑’을 끼고 하루하루 변함없이 사랑을 전했다.
■ 노인의 나라는 없다... 2명 중 1명 소득빈곤
한국의 노인빈곤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높다. OECD의 ‘한눈에 보는 연금 2023 보고서’를 보면 한국의 66세 이상 노인 인구의 소득 빈곤율은 40.4%로, 10명 중 4명이 가난한 것으로 나타났다. 76세 이상은 더 심각하다. 2명 중 1명(52.0%)이 소득 빈곤 상태다.
특히 경기도는 더 심하다. 경기도 자료를 보면 도내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는 45만명, 독거노인은 36만명에 달한다.
소득 빈곤 현상의 배경으로는 △국민연금 제도의 미비 △가족 부양 의식 약화 △일자리 부족 △사회적 안전망 부족 등이 꼽힌다.
연금의 경우 1988년 국민연금 도입 당시 가입하지 못한 세대가 많아 사실상 연금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이 적지 않다.
이런 이유로 일부 노인들은 연금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충분히 받지 못하는 형편이다.
과거와 달리 자녀들이 부모를 부양하는 문화가 약해진 것도 문제다. 핵가족화와 개인주의로 인해 노인들이 스스로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경우가 증가하면서 빈곤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이 밖에도 안정적인 고령층 일자리의 부족 문제나 충분하지 않은 사회적 복지 혜택도 노인들을 빈곤에 처하게 만드는 여러 요소들 중 하나다.
더 큰 문제는 한국의 고령화는 현재진행형이며, 그 속도가 갈수록 빨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2035년부터 고령인구(만 65세 이상)가 전체 인구의 30%를 넘을 전망이다. 2045년에는 42.8%로 고령인구 비중 세계 최고국이 될 것이란 예측도 있다.
■ 이대로면 ‘빨간 장갑’ 끼기 어렵다
노인 빈곤이 사회적 문제가 된 지 오래지만 여전히 관심을 갖는 이들은 많지 않다.
노인 빈곤은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자연재해와 같지만 먼 나라의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처럼 외면하기 일쑤다.
수원시 모 복지관에서 근무하는 A씨는 “코로나19 이후 기업, 단체 후원이 줄었다. 정부, 지자체 지원도 녹록지 않다. 노인 빈곤은 심각하고 환경은 열악하다. 이대로면 누가 빨간 장갑을 끼고 봉사를 하러 와주겠나”고 고백했다.
한 비영리 민간단체 대표 B씨는 “노인들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한 끼는 정부, 지자체가 아닌 개인의 선의로 지원이 이뤄진다”며 “장애인이나 독거노인,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들에게 도시락을 배달하는 데 큰돈이 들어가는데, 지자체는 지원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비용의 대부분을 비영리 단체에서 부담하는 실정이다”고 토로했다.
도내 한 봉사단체는 지자체의 도움은커녕 오히려 이들 때문에 대기업의 후원을 받지 못한 일도 있었다고 털어놨다.
지자체와 기업 양측의 소통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못했고, 봉사에 대한 인식이 서로 달랐고 이를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봉사단체 관계자들은 경기도와 시·군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 관련 문제를 조율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고 입을 모았다.
봉사단체에 따르면 도내 여러 무료 급식소는 지자체 지원 없이 운영 중이다. 특히 주말이나 공휴일에 급식을 하면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된다.
최영화 수원시봉사센터장은 “사실 주말 무료 급식소 운영이 제일 시급한 문제다”며 “당장 수원 내 주말 상시로 운영하는 무료 급식소가 없다. 장소 대관이 여의치 않으니 제자리걸음인 상황이다”고 말했다.
최 센터장은 “최근 일부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외부 봉사 활동을 금지했다. 학생들은 봉사의 가치, 인식도 사라진 채 사회로 나온다”며 “자연스럽게 학부모님들도 봉사에 대해 관심을 거두고 있다. ‘남을 돕는다’는 개념이 사라지는 것 같다. 모두가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닐까”고 안타까워했다.
■ 밥 한끼는 우리가 내미는 따뜻한 손길
반가운 소식도 있다. 경기도 관계자는 경기일보와 통화에서 “내년 노인 관련 무료 급식 지원 예산을 전년(48억원)보다 소폭이나마 올렸고, 각 봉사단체를 도울 예정이다”고 밝혔다.
도 관계자는 “한국이 초고령 사회에 진입한 만큼, 예산 증액과 도내 지자체 지원에도 계속 노력하겠다”며 지원을 약속했다.
한편, 급식소에서 만난 봉사자 권씨의 말은 봉사의 의미를 다시 돌아보게 했다.
그는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기적인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세상에서 말이다”며 “급식소의 한 끼는 단순하게 밥 한 끼가 아니라 노인들에게 생명을 전하는 일이다. 우리 모두가 내미는 사랑의 손길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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