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미술이 탄탄하게 성장할 수 있는 배경엔 전국 팔도의 예술가와 이들의 이야기를 발굴해내는 사람들, 그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는 시민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고고학자가 깊은 땅속에 묻힌 과거를 발굴해 우리가 알지 못하던 유의미한 사실을 밝혀내듯 지역의 미술사를 발굴해내고 생명력을 불어넣는 이가 있다.
이채영 학예사(37)는 공립의 수원시립미술관에서 8년 차 학예전시과 전문 인력으로 활약하고 있다. 흔히 미술관을 떠올렸을 때 큐레이터의 역할이라 할 수 있는 미술관의 전시 기획에서부터 자료수집 및 보존관리, 동시대 미술 연구, 지역미술 자료 발굴 및 연구를 담당한다.
특히 그는 한국 미술사에서 상대적으로 조명이 부족했던 수원 작가에 대한 재평가와 연구, 근현대 수원 미술사의 정립을 위해 2017년부터 수원시립미술관이 진행하는 ‘수원미술연구’를 시작부터 도맡아 발간하고 있다. 이달 초 발간된 이번 8집 연구는 동양화가 이영일의 수원 시절 작품 세계를 최초로 조명했다는 의미가 있다.
이 학예사는 “가족들을 찾아가 이영일 선생에 관한 생생한 일화를 듣는 게 굉장히 즐거웠다”며 “이영일 선생은 새와 동물에 관한 사실적인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구이용으로 판매될 뻔했던 참새를 사와 한참을 관찰했다거나 동물원을 방문해 공작을 관찰하고 집에도 새가 정말 많았다는 아드님과 손자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이번 8집에서 주목할 점은 수원 출신 작가 나혜석의 1920년대 프랑스 체류 시기 사진을 중심으로 그의 유학 시절을 조명한 것이다. 수원시립미술관은 그동안 나혜석의 작품 세계와 그의 일생에 대해 연구하고 그 기록을 보존해 왔다. 2023년에는 한경미 영화감독으로부터 1928년 나혜석이 프랑스인 샬레의 집에 머물던 시기의 사진을 기증받았다.
이 학예사는 “나혜석은 1927년부터 1929년까지 구미 여행을 했는데 이때 나혜석 작가가 쓴 유럽에서의 여행 시기에 관한 여러 감상을 잡지 등에 기고한 많은 글들을 읽었다”며 “프랑스의 한 가정에 3개월간 머물렀고 프랑스의 가정은 조선과는 어떻게 다른지 등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그런데 그 글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사진으로 직접 마주했을 때엔 전율이 느껴졌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이러한 연구가 지역의 소중한 유산과 인물을 이해하는 데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며 “그동안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시선이 가닿지 않은, 혹은 몰랐던 지역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발굴하고 보존해 관람객에게 전해질 때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 학예사는 그동안 가려졌던 지역의 또 다른 인물을 발굴해 우리 앞에 펼쳐 놓을 계획이다. 그중 가닥이 잡힌 인물은 여성 동양화가 동초 이현옥 선생(1909~2000)이다. 이 학예사는 “선생께서 수원에 정착해 생활했다는 기록을 찾게 돼 이를 토대로 연구할 계획”이라며 “현재까지 발굴되는 자료가 많지 않아 많은 노력을 해야 할 것 같다. 발굴되는 소중한 지역 예술인들의 이야기와 그들의 작품에 시민들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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