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현장의 ‘목격자’가 되어 그들의 시선과 발걸음을 따라가 봤으면 좋겠습니다.”
‘723915’, ‘85c-3128’, ‘K82-2150’, ‘10846’. 10자리 남짓의 이 숫자는 한 명의 ‘아이’에게 부여된 고유번호다. 해외로 입양 가는 아동을 분류하기 위해 개별 입양기관마다 기관 고유의 번호 체계를 만들어 붙인 것이다. 그렇게 대한민국에서 해외로 보내진 아이들의 숫자는 20만명.
지난 14일 개봉한 조세영 감독의 다큐멘터리 독립영화 ‘케이 넘버’가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조 감독은 친생 가족을 찾기 위해 한국을 찾은 해외 입양인들이 조작된 서류와 감춰진 기록을 추적하며 그 이면의 이야기를 영화로 파헤쳤다. 영화엔 ‘메이드 인 한국인-해외입양을 말하다’(2004)에서 한국의 해외 입양 제도와 해외 입양인들의 목소리를 본격 조망하기 시작한 그의 끈질긴 추적기가 담겨 있다. 2시간 내내 관객을 ‘아동 수출국’이라는 한국의 불편한 진실과 해외 입양인들이 마주하는 현실로 안내한다.
작품 개봉을 하루 앞둔 날, 그가 다큐멘터리 수업을 가르치고 있는 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 강의실에서 만난 조 감독은 “한국으로 돌아온 여러 입양인과 만나며 그들이 자신의 입양 원본 기록을 찾기 위한 과정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불합리한 상황을 목격했다”며 “입양인 대부분 스스로에 관한 정보를 어느 기관에서도 제대로 확인할 수 없다는 걸 걸 알고 6년간 직접 입양인들을 만나고, 실체적 진실에 다가가며 영화 ‘케이 넘버’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영화는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다큐멘터리 경쟁 ‘다큐멘터리 관객상’(2024), 제50회 서울독립영화제 장편 경쟁 ‘대상’ (2024), 제50회 서울독립영화제 ‘열혈스태프상’(2024), 제22회 코펜하겐 국제 다큐멘터리영화제 F:ACT AWARD (2025), 제13회 디아스포라 영화제 디아스포라 장편(2025)을 수상했다. 특히 ‘관객상’은 관객들이 직접 투표로 뽑아준 상이기에 의미가 남다르다.
조 감독은 당시 한국으로 돌아온 여러 입양인들과 만나며 그들이 자신의 입양 원본 기록을 찾기 위한 과정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들을 목격한다. 입양인 대부분은 스스로에 관한 정보를 어느 기관에서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이후 6년간 그는 직접 입양인과 만나고, 실체적 진실에 다가가며 영화 ‘케이 넘버’를 만들게 된다.
‘케이 넘버’에서 관객은 4명의 이야기를 따라가게 된다. ‘723915(김미옥)’. 8세(추정) 때 길에서 발견돼 미국으로 입양된 미오카는 서류에 적혀 있던 이름 ‘미옥’에 스스로 A를 붙여 ‘미오카’라는 이름을 짓는다. 친생모를 찾기 위해 여러 차례 한국에 왔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그런가 하면 ‘K82-2150(신선희)’은 태어난 지 4개월 만에 덴마크에 입양됐다. 인생의 절반을 한국에 돌아오기 위해 살았다는 그녀는 ‘당신은 입양 가서 행복한가’라는 질문에 자신의 행복에 대해 아무도 물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조 감독은 “네 사람의 이야기는 이들만의 이야기가 아닌, 수많은 해외 입양인이 공통으로 겪어온 문제”라며 “덴마크에서 열린 상영회에 100명이 넘는 입양인 관객들이 자리했는데, 이들이 ‘영화를 만들어줘서 고맙다’는 말을 해 기억에 남았다”고 말했다.
영화는 ‘고아’가 아님에도 아동을 ‘고아’로 만들고, 그 속엔 미혼모와 미혼모의 아이를 ‘정화’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으며, 한국전쟁 이후 해외로 아동을 ‘수출’하며 국가의 ‘자산’을 채우는 모습, 깨끗하고 정갈화된 ‘입양 시스템’은 전 세계 유례없는 시스템으로 정착됐다는 점 등 보고도 믿기지 않는 사실을 나열한다. 전문가와 함께하는 밀도 높은 추적기는 묵직하지만, 전달 방식은 친절하고 자세하다.
“제가 만난 많은 해외 입양인들이 이렇게 묻더군요. ‘한국인들은 입양인들이 돌아오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요?’라고요. 당시엔 제대로 답할 수가 없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존재조차 알지 못할 테니까요. 하지만 이젠 우리가 함께 답을 찾아가야 한다고 결론을 지었어요.”
그의 말처럼 영화는 동정도, 연민도, 분노도 필요 없다고 말한다. 다만 이런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이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함께 알아야 한다고 한다.
“있는 그대로 사실을 바라봐줬으면 좋겠어요. 바로 며칠 전 ‘입양의 날’에 상영회를 한 적이 있는데 그 자리에서 왜 ‘입양인의 날’은 없을까 누군가 말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누군가의 일생은 자신의 잘못이 아닌 이유로 희생되고 고통받고 있어요. 이러한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공감’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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