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안 단지동맹] 그 항아리에 단지동맹 증거가 잠들어 있다
[골목 안 단지동맹] 그 항아리에 단지동맹 증거가 잠들어 있다
  • 이연우 기자 27yw@kyeonggi.com
  • 입력   2021. 04. 11   오후 9 :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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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황병길 선생 외손 박동일웅 인터뷰
"나와 같은 단지동맹 핏줄, 한명이라도 만나고파"

1909년 3월 안중근 의사와 항일투사 11명이 왼손 넷째 손가락 첫 관절을 잘라 혈서로 대한독립(大韓獨立)을 썼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1910년 8월29일)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1919년 4월11일)하기까지 우리네 독립운동 역사에서 이들은 단지회(斷指會)라 불린다. 102년이 지난 현재 단지회 후손들은 러시아, 중국, 카자흐스탄 등 세계 곳곳에 나뉘어 살고 있다. 우리나라 어딘가에도 단지회의 후손이 뿌리를 내렸겠지만 ‘가난하고 어렵게 산다’는 부정적 인식에 도통 모습 드러내길 꺼려 자취를 찾기가 쉽지 않다.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골목 안 독립운동가 후손을 조명하며 사회적 지원책을 모색한다. 편집자 주


과거를 회상하던 박동일웅 어르신(84)이 조용히 눈물을 삼키며 목을 가다듬었다. 이윽고 그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외조부의 유해를 수습하기 위해 배에 올라 중국을 방문했던 30년 전 이야기를 시작했다.

“1992년이었어. 외할아버지 산소를 찾으러 무작정 중국을 갔는데 도무지 알아낼 수가 있어야지. 내가 석 달 동안 머물면서 묘를 찾아 헤맸어. 그러다 우연히 일흔여덟살 할아버지를 만났는데 ‘일곱살에 누군가의 유해를 묻었던 산소를 본 기억이 난다’는 거야. 그 할아버지 말씀대로 찾아갔더니 산 중턱 국경에 묘소 하나가 덩그러니 있었지. 밤을 새우며 사흘 동안 파고 팠더니 일본놈들이 신던 군화가 나오더라고. 거기가 맞았어. 우리 외조부의 묘, 황병길 대장의 묘였어”


■독립운동 가문, 어린 시절 곳곳에서 드러나는 ‘항일투쟁’

박동일로 태어난 박동일웅 어르신은 일제강점기 창씨개명으로 이름 끝에 ‘웅’ 한 자가 더 붙었다. 이름 모두를 바꿀 수 없다며 가족이 함께 내린 궁여지책이다.

박 어르신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된 황병길 선생의 외손자다. 외할머니는 훈춘 대한애국부인회 부회장이던 김경숙 선생이며, 외삼촌은 김일성과 독립운동을 함께한 황정해 선생이다. 조부모는 물론 부모의 모든 형제까지 대대로 독립운동가 집안이라 자라는 내내 영웅전을 들어왔다.

그는 ‘특별할 것 없이 평범한’ 어린 시절 일화 중 하나라며 어머니가 습관처럼 하던 말을 소개했다. 그 전언에서 단지동맹 활동을 엿볼 수 있었다. 박동일웅 어르신은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기로는 외조부가 손가락을 잘라 전지만 한 태극기에 ‘대한독립’을 썼다고 했지. 그 손 마디(단지)는 피가 묻지 않게 기름종이에 싸서 항아리에 넣었다고, 나이가 들어도 이 사실을 절대 잊어선 안 된다고 했어. 시간이 흐르고 보니 그게 지금 ‘단지동맹’이라고 부르는 것의 증거가 됐어”라며 겸연쩍어했다. 뒤이어 그는 느릿한 말투로 “항아리와 (손가락을 잘랐던) 도낏자루, 권총을 같이 묻었다는데 이북 땅에 있어 이젠 찾고 싶어도 찾을 수가 없네”라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쉬쉬’…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단지회 후손

“아흔을 바라보고 있어 욕심이라면 욕심이지만” 박 어르신은 다른 단지동맹 후손을 만나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비슷한 인생사를 걸어온 다른 이들과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싶다는 하릴없는 이유다. 수십 년 단지회 소속 후손들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직까지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그는 “괜히 부끄러워 인터뷰도 하지 않았는데 이젠 절실하기 때문에 나서게 됐다”라며 “후손들과 함께 대화를 하고 싶을 뿐”이라고 전했다. 보훈처나 광복회 등 유관기관ㆍ단체도 현재 단지동맹 후손이 정확히 몇 명이고, 어디에 살고 있는진 파악이 안 돼 박 어르신과의 만남을 성사시키지 못했다.

그러면서 “독립운동이라는 게 비밀리에 이뤄지다 보니 단지회 운동가들이 더 있을 수도 있지. 하다못해 옆집에 있을 수도 있고. 그런데 안중근 의사처럼 이름 알려진 운동가 말고는 다들 자기가 후손이라는 걸 안 알리려고 해. 얘기해봤자 (딱히)…”라며 말을 아꼈다.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가 곁에 있다는 것만”

박동일웅 어르신은 본인 인생에 갖은 굴곡이 있었다면서도 ‘힘들었다’거나 ‘어려웠다’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대신 “중국에선 ‘훈춘의 호랑이’로 불린 외조부의 동상을 만들겠다고 하고 있어. 훈춘마을의 위인이라고 우리 가족을 영웅 대접하지. 우리나라는 조용한데 중국이 더 바빠”라고 호탕하게 웃음을 보였다.

끝으로 그가 덧붙인 말이다. “우리나라에도 나 같은 독립운동가 후손이 참 많을 텐데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어. 나라에서 충분히 도와주고 있으니 더 이상은 지원해주지 않아도 돼. 하지만 ‘단지회에 황병길 선생이 있었다’ 그 정도만이라도 알려지면… 내 나이에 더 바랄 게 없네”.

1885년 음력 4월15일 함경북도에서 태어난 황 선생은 스무 살이던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국권 회복을 위해 중국으로 떠나 독립운동을 전개한 인물이다. 훈춘지역 일대에서 사포대(射砲隊) 활동을 하다 안중근ㆍ최재형이 이끄는 의병대에 들어간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는 당시 혼자서 일본군 14명을 사살해 ‘훈춘의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후 1909년 단지동맹을 통해 피로 대한독립을 결의했다. 1919년 3월20일엔 시위 군중 5천 명을 모아 3ㆍ1독립선언 축하 민중대회를 열고 평화 시위를 주도했으며 군자금 모음 활동, 대한국민의회 설립 지원 등 다양한 항일운동을 벌였다.

이연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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