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1879~1910) 의사는 1909년 만주 하얼빈에서 한반도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했다. 이후 중국 뤼순형무소에 수감돼 이듬해 2월14일 사형이 선고됐고, 3월26일 처형됐다. 안 의사는 재판 과정에서 ‘동양평화’를 설파하며 일본의 부당한 침략행위를 알렸다. ‘동양평화론’은 안 의사가 옥중에서 쓴 미완성의 책이다. 사이버 외교사절단 반크는 3월 26일 안중근 의사 순국일을 ‘동양 평화의날’로 제정하자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안중근 의사를 생각하면, 먼저 단지(斷指)를 한 의연한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안 의사는 1909년 동지 11명과 목숨 바쳐 구국투쟁을 벌일 것을 손가락을 끊어 맹세했다. 왼속 약지의 첫 관절을 자르고 혈서로 ‘대한독립(大韓獨立)’을 썼다. 이 애국결사 모임이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다.
이들은 그해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처단을 결심한다. 동지 우덕순과 거사의 뜻을 같이하고 동지 조도선과 통역 유동하와 함께 이강의 후원을 받아 행동에 나섰다. 안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 저격에 성공했으나, 그 또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안 의사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고, 1970년 서울에 기념관이 건립됐다.
단지회의 다른 멤버들에 대해선 크게 알려진 것이 없다. 드러내놓고 독립운동을 펼칠 수 없었던 까닭일 것이다. 때문에 현재 후손들의 현황은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다. 보훈처와 광복회 등에서도 후손이 몇 명이고, 어디 살고 있는 지 알지 못한다.
시간이 흐르며 애국지사들의 독립운동이 점점 잊혀져 가는 것을 후손들은 몹시 안타까워 한다. 단지회 일원이었던 ‘훈춘의 호랑이’ 황병길 선생의 외손자 박동일웅씨(84)는 어딘가에 뿌리 내렸을 단지동맹의 후손을 만나보는 것이 소원이다. 비슷한 인생사를 걸어왔을 후손들을 만나 조상의 독립운동과 조국사랑 얘기 등을 나누고픈 것이다.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독립유공자들의 삶은 힘겨웠다. 정부 지원이 늘었다해도 애국지사 후손들은 여전히 어렵고 외롭다. 정부는 독립운동가 발굴 및 후손 지원 확대 등에 꾸준히 관심을 가져야 한다. 박동일웅씨의 소원도 이뤄지도록 하면 좋겠다.
이연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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