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열수 칼럼] 방역에도 정의가 있는가
[김열수 칼럼] 방역에도 정의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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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의 제4차 유행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비상이 걸린 방역 당국도 사회적 거리두기를 연장하고, 일부에서는 강화했다. 어느 정도까지 통제해야 할까? 아니 어느 정도까지 통제하는 것이 정의로운 것일까? 정의론의 대가인 마이클 샌들 교수도 선뜻 답을 내 놓지 못할 것 같다.

코로나19의 대유행에 대응하는 방역의 형태는 각 국가의 수만큼이나 달랐다. 그런데도 크게 서구 모델과 중국 모델로 나눌 수 있다. 서구 모델은 방역에서도 개별 정부가 개인의 생명과 신체에 대한 자유,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 거주이전의 자유, 그리고 집회결사의 자유 등을 선뜻 침해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는 사이에 코로나19가 급속하게 퍼져 나갔고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중국은 강력한 통제로 대응했다. 후베이성 우한시에서 코로나19로 사망자가 속출하자 중국은 우한시의 출입을 전면 통제했다. 인구 1천만명이 넘는 거대 도시 하나를 완전히 봉쇄해 버린 것이다. 주민들은 주거단지를 벗어날 수 없었고 시내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도 없었다. 무려 두 달 동안 이렇게 살았다. 확진자가 발생한 중국 내 다른 지역에서도 봉쇄와 강력한 통제는 예외가 아니었다. 덕분에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지 않게 됐다.

어떤 모델이 정의로운 것일까? 불특정 다수가 죽더라도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정의일까? 아니면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철저히 통제하는 대신 불특정 다수 생명을 구하는 것이 정의일까? 두 모델 모두 이상적이면서도 극단적인 모델이긴 하다. 비서구인의 입장에서 보면 많은 사람이 희생된 서구 모델은 무능하고 비효율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서구 모델은 철저히 자유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 긴 세월 동안 축적된 서구 문화는 근본적으로 통제를 혐오한다. 이런 연유로 정부나 국민이나 모두 선뜻 봉쇄와 통제를 내밀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한다. 통제라는 카드를 한 번 내밀고 또 받아들이게 되면 그 끝이 어떻게 될지 역사를 통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서구 모델은 미래에 대한 불안이 현재를 저당 잡았기에 희생은 불가피했다.

중국 모델을 칭찬하는 사람들이 있다. 강력한 봉쇄와 통제로 코로나 확산을 차단하면서 많은 사람의 생명을 살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9월 중국 정부는 코로나 방역에 기여한 유공자를 포상함으로써 ‘코로나 종식’을 선언했다. 서구 모델에 대한 중국 모델의 승리를 선언하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중국 모델은 대(大)를 위해 소(小)를 희생하는 집단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두 달 동안 봉쇄를 당하고 주거 단지에서 출입조차 자유롭지 못했던 우한 시민들의 자유와 인권에는 관심이 없다. 이런 조직적인 봉쇄와 통제에 대한 자신감이 중국을 더욱 집단주의 국가로 끌고 갈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중국 모델은 현재에 대한 자신감이 미래를 저당 잡게 될 것이다.

무엇이 정의일까? 사람이 죽더라도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하는 것이 정의일까 아니면 사람의 생명을 위해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철저히 통제하는 것이 정의일까. 서구 모델과 중국 모델 사이에는 여전히 긴장이 존재한다. 중국에 거주하던 지인이 얼마 전 귀국해서 하는 말이 한국의 통제는 통제 축에도 못 낀다는 것이다. 통제의 질과 폭을 결정하는 성숙한 시민의식의 수준이 진정한 정의이지 않을까?

김열수 한국군사문제연구원 안보전략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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