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용의 이심전심] 생명·인간·행복이 중심인 세상을 꿈꾸며
[송경용의 이심전심] 생명·인간·행복이 중심인 세상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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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무지’(T.S.Eliot)라는 시에 나오는 ‘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말은 본디 특정한 어떤 사건을 두고 한 말이 아니다. 4월이 되면 겨우내 움츠리고 잠자던 삼라만상이 깨어나고 약동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여는데 아직도 두꺼운 껍질 속에 잠들어 있는 인간이 깨어나기 위해 감당해야 하는 고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껍질을 뚫고 나온다는 것은 자신을 이겨내고 새로운 세상과 만나는 일이다. 새로운 생명으로 세상과 만나는 일은 참으로 아름답고 설렌다.

그러나 4월이 오면 저절로 화려한 꽃들이 피어나고 연초록 세상이 열리는 것이 아니다. 기나긴 겨울 동안 견디고 버티면서 자신을 키워온 자들만이 열 수 있는 아름다운 특권이다.

두꺼운 흙더미와 껍질을 뚫고 온 산천을 물들이는 생명의 약동을 보면서 ‘생명의 가치’를 생각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생명’은 얼마만큼의 가치를, 값어치를 지닌 것일까?

특별히 우리 삶을 지배하는 가장 큰 권력인 경제(우리는 모두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에서 살고 있다), 경제활동, 경제학에서 우리들의 생명은 어떻게 취급되고 있을까?

봉건제 사회에서는 왕족과 귀족을 제외하고 대부분 사람이 신민, 농노로 묶여 있었다. 시민혁명이 일어나면서 시민으로서 정치적, 사회적 권리를 획득하였고 개인의 자유가 확대되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손’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에서 우리는 또다시 계약이라는 형식으로 자본, 더 많은 이익 창출에 묶여 있는 존재가 되었다.

노동은 생산의 한 요소가 되었고 경쟁력에 따라 등급이 매겨지는 상품이 되었다. 인간, 생명, 가족, 이웃, 연민, 자비, 사랑, 이런 단어는 경제와는 무관한 것이 되었다.

19세기 영국의 사상가이자 경제학자인 존 러스킨은 생명, 인간이 무시되고 도구가 되어버린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발달 시기의 참상(!)을 보면서 ‘생명의 경제학’을 주창했다. 성경에 나오는 포도밭 주인의 이야기(마태복음 20장, 아침에 온 사람이나 오후에 온 사람이나 똑같은 보상을 주었다는)를 주제로 쓴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라는 책에서 ‘경제학에는 무엇보다도 인간의 정신과 영혼이 담겨 있어야 한다’, ‘노동자는 생산에 부속되어 소모되는 부품이 아니라 영혼과 마음, 꿈을 지닌 존재다’, ‘생명은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유일한 부’라고 했다. 아무리 굶주려도 어머니와 아들이 빵 조각을 두고 싸우지 않는 것처럼 서로를 이겨야만 하는 경쟁만이 유일한 인간관계라고 할 수 없다고 했다.

모두가 더 많은 생산, 더 많은 이익을 위해 달려갈 때 생명과 인간의 존엄을 설파한 존 러스킨의 ‘생명의 경제학’은 많은 비난에 시달렸지만, 노동자들은 물론이고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꾸었던 사람들, 간디, 톨스토이 등 수많은 지성의 인생관을 바꿔놓을 정도로 영향이 컸다.

경제, 기업활동에서 인간을 중심에 놓아야 한다는 ‘인간적 경제, 모두를 위한 경제’를 주창하는 루이지노 브루니 교수의 아래와 같은 주장도 깊이 새기면 좋겠다.

‘서구의 근대 경제학은 인간의 행복을 개인의 물질적 향유의 경쟁적 증가로 대체해 버렸다. 화폐로 계산되지 않고 손익을 따지지 않는 공감과 배려, 무상성(Gratuitousness)의 나눔으로 풍요로워지는 인간관계는 무시되었다.’

브루니 교수는 경쟁, 성과주의가 마치 경제, 기업 운영의 전부인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연민, 자비, 사랑, 자신과 이웃의 존재를 잃어버림으로써(통제하거나 버림으로써) 오히려 지속가능성의 기반인 인간의 상상력과 창의력, 자유는 더욱 축소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사랑, 자비, 연민 등 생명의 존엄을 기초로 기업과 사람이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적 공간을 함께 만들어가는 ‘인간의 경제, 사랑의 경제, 공동체 경제(콤무니타스 이코노미)’가 결국은 더욱 수준 높은 문명을 만들어 갈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상 최악으로 치달은 기후 비상, 불평등, 양극화, 세대 간의 갈등, 산업과 노동의 변화, 팬데믹 등 산적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에 대해 근본적인 성찰을 해야 한다. 어려울 때 있을수록 근본을 돌아봐야 한다.

혁명이라는 영어 단어 ‘Revolution’의 의미도 근본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무엇인가를 바꾸고 싶다면 근본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순간을 모면하고자 땜질하듯이 해서는 생명은 부차적인 것이 될 것이고, 인간은 여전히 생산의 한 요소로, 부품, 상품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하듯이 우리 스스로 깨치고 변화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너나없이 모든 생명과 인간이 존엄한 대접을 받으려면, 모두가 행복해지는 사회를 원한다면 ‘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말처럼 우리 스스로 깨치고 변화해야 한다. 우리를 덮은 관습, 패배의식이라는 두꺼운 껍질을 깨트려야 한다. 생명, 인간, 행복이 중심인 새로운 세상은 가능하다. 우리가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여러모로 가장 큰 책임을 감당하고 있는 정치하는 사람들, 경제를 움직이는 사람들에게 존 러스킨의 이 말을 전하고 싶다.

‘생명을 제외하고는 어떤 부도 있을 수 없다. 가장 부유하고 풍요한 나라는 최대다수의 고귀하고 행복한 사람을 양성하는 나라이다.’

송경용 성공회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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