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부부 독립운동가를 찾아서] 3-2. 만삭의 몸으로...만세운동 이끈...‘파주의 유관순’
[경기도 부부 독립운동가를 찾아서] 3-2. 만삭의 몸으로...만세운동 이끈...‘파주의 유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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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명애, 유관순과 함께 수형생활하며 옥중 출산
부부, 수감 중에도 창가 부르며 희망의 끈 잡아
뀭-꾅 파주지역 만세운동 이끈 임명애·염규호
▲ 임명애 수형 사진
임명애 수형 사진

‘파주의 유관순’ 임명애는 임신한 상태로 만세시위를 하다 체포됐다.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환경에서 감방 안 육아는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었다. 영화 <항거>에도 임명애를 모티브화한 인물이 등장한다. 결국 아이를 잃게 된 임명애는 출소 이후 어떤 삶았을지 모른다. 남편 염규호와 함께 그들의 행적이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밝혀진 바 없다. 단순히 종교인이나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넘어 독립운동가로서의 재조명이 필요한 시점이다.

보안법출판법 위반, 징역형… 주민들 우르르 반발

시위를 주도한 임영애 부부를 비롯한 김수덕ㆍ김창실 등은 검거됐다.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임영애는 징역 1년 6개월, 나머지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그녀는 서대문형무소 8호 감방에 수감돼 옥고를 치렀다. 남편도 수감됨으로 부부가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

이를 계기로 청석면 주민 수백 명이 심학산에 모여 면사무소를 향해 나아갔다. 보통학교 학생들은 태극기를 손에 쥐고 선두에 나섰다. 이들은 면사무소 앞뜰에서 “면장은 나와 만세를 부르라”고 외쳤다. 면장은 처음에 해산을 종용하다가 결국 시위행렬에 가담하기도 했다.

1919년 3월28일 봉일천 장날(공릉장)에는 ‘장꾼’과 광탄면 주민 등이 합세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여기에는 고양군 주민 등도 참여했다. 지역적인 한계를 뛰어넘는 연합시위가 이뤄진 셈이다. 일제 헌병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인 발포를 시작했다. 현장에서 6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을 당했다. 대규모 만세시위가 피로 얼룩진 역사현장으로 기억되는 순간이었다.

▲ 염규호 수형 사진
염규호 수형 사진

옥중투쟁으로 존재감을 알리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임명애는 8호 감방에 배정됐다. 여자감옥인 8호방은 개성지역 3ㆍ1운동 주역인 어윤희ㆍ권애라ㆍ심명철과 3ㆍ1운동 아이콘인 유관순 열사, 수원지역 기생으로 이름을 떨친 김향화 등이 함께 수형생활을 했던 곳이다. 임명애는 당시 만삭의 몸이었다. 출산을 위해 임시 출소했다가 아이를 낳고 12월에 갓난아이를 품에 안은 채 다시 수감됐다. 이때 남편 염규호도 1년형으로 복역 중으로 온 가족이 모두 수형생활을 하는 고난의 시절을 보냈다. 혹독한 겨울을 맞이하며 차디찬 감방에서 산후조리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맡언니격인 어윤희는 어려운 여건에도 편의를 제공하는 데 헌신을 다했다. 아이의 기지개는 물론 산모 건강을 위해 조언과 세심한 보살핌을 잊지 않았다는 전언이다. 1920년 9월께 만기 출소한 임명애는 먼저 출소한 남편 염규호가 있는 파주 교하리 고향에 돌아왔다.

이들 부부는 수감 중에도 희망의 끈을 일순간마저 버리지 않았다.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전통적인 창가를 가사한 노래를 불렀다. 현재 남아 있는 창가는 모두 두 곡으로, 심명철이

생전에 아들 문수일에게 구술했다. 두 노래는 <선죽교 피다리>(1991, 장수복 저)라는 소책자에 실린 바 있다. 본격적으로 대중에게 알려진 노래는 ‘선죽교 피다리’와 ‘대한이 살았다’다.

▲ △ 임명애 훈장증
왼쪽부터 임명애 훈장증, 염규호 훈장증

힘든 생활 노래 가사로 전달… 파주 항일운동가 더 발굴돼야

“진중이 일곱이 진흙색 일복 입고 두 무릎 꿇고 앉아 주님께 기도할 때 접시 두 개 콩밥덩이 창문열고 던져줄 때 피눈물로 기도했네 피눈물로 기도했네 피눈물로 기도했네”…‘선죽교 피다리’

“대한이 살았다 대한이 살았다 산천이 동하고 바다가 끓는다 에헤이 데헤이 에헤이 데헤이 대한이 살았다 대한이 살았다”…‘대한이 살았다’

당시 이들 부부가 불렀던 노래 가사에서 ‘피눈물로 기도했네’라는 부분은 참기 힘든 옥중생활을 사실적으로 알려준다. 두 번째 가사는 전국에 확산된 3ㆍ1운동의 기운을 ‘대한이 살았다’라는 노랫말로 독립을 바라는 의지와 염원을 보여준다. 3ㆍ1운동 한돌을 맞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전개된 옥중투쟁은 이러한 사실과 무관하지 않았다.

가사는 누가 지었는지 알 수 없으나 권애라가 아닐까 추정한다. 그녀는 음악적인 재능이 아주 뛰어난 신여성이었다. 김향화는 수원을 대표하는 명창으로 창가를 듣고 권애라가 이를 시대 상황에 맞게 정리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짐작되는 상황이다.

▲ △ 파주 교하 31독립운동 기념비
파주 교하 31독립운동 기념비

임명애ㆍ염규호 부부에 대한 독립운동가로서의 인생항로는 현재까지 여기까지만 피상적으로 알려져 있을 뿐이다.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등 각종 단체들은 이 부부의 복역 이후 사망할 때까지의 힘든 생활이 새롭게 발굴되기를 바란다. 신앙인으로서의 삶과 아울러 이들 후손에 대한 삶도 미답지나 마찬가지다. 더불어 이들에 대한 관심을 시작으로 장차 파주지역의 여타 항일운동가와 그들에 대한 새로운 모습, 또 역사적 자료 등이 추가로 복원되기를 기대한다.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사진=구세군역사자료관서대문형무소역사자료관 제공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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