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역설'이 주는 진리

“저는 누군가 화성에 생명체가 살고 있다고 말한다면 믿을 수 있겠지만, 이 세상에 하느님이 살아 계시다고 말한다면 믿지 못하겠어요!” 유학 시절, 인연을 맺은 한 젊은 수학자의 말이다. 독일의 한 대학 부설 연구소에서 교환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던 그는 아내와 함께 한인 천주교 공동체에 나왔다. 아내 홀로 신자였기에, 필자는 그에게 천주교 신앙을 가져보라고 여러 차례 권유했다. 하지만 그는 신앙을 받아들이길 주저하였다. “눈으로 볼 수 없고 만져볼 수 없으며 들을 수 없는 대상을 어떻게 믿을 수 있나요?” 젊은 수학자의 질문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수학’이라는 논리적 학문과 싸움하며 지낸 시간이 짧지 않았으니, 실제로 검증하고 확인할 수 없는 대상을 믿는다는 것이 그에게는 무척 어려운 과제였을 것이다.

필자는 대략 3년 전부터 천주교 사제가 되길 원하는 학생들의 양성을 맡고 있다. 그들에게 ‘신학’을 가르치고, 기숙사에서 함께 거주하며 그들을 동반하고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에 입학한 새내기부터 연말이면 사제가 될 시간을 준비하고 있는 이들, 곧 부제들이 하나의 생활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20대 젊은 나이에 그들은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며 세상을 위하여 살아가고자 결심하면서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누가 혹은 무엇이 그들을 이곳까지 불렀을까? 무엇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소유를 포기하면서까지 사제가 되려고 하는가? 세상이 주는 즐거움을 포기하고 하늘이 주는 희망에 자신의 미래를 걸고 사제의 길을 선택한 젊은이들이 대견하고 기특하다.

세상은 인간의 오감으로 체험할 수 있는 현상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 역시 존재한다. 세상의 사건들을 대부분 과학적 검증을 통하여 이론적 설명이 가능하지만, 반대로 논리적 설명이 불가능한 경우도 많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인간의 이성적 능력으로 설명할 수 없는 구체적 사례 중 한가지로 꼽을 수 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추문이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사형수에 관한 규정 때문이다. “죽을죄를 지어서 처형된 사람을 나무에 매달 경우, 그 주검을 밤새도록 나무에 매달아 두어서는 안 된다. 반드시 그날로 묻어야 한다.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신명 21,22-23; 갈라 3,13). 천상 권능을 가지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오시어 이스라엘의 원수를 물리치는 절대적 군주의 메시아를 기다리던 유대인들에게 저주받은 이들의 상징이었던 십자 나무에서 힘없이 최후를 맞이한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십자가 위에 매달린 예수를 바라보며 비웃고 손가락질하며 놀렸다. 하지만 하느님의 선택은 변함없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였다. 그의 방법은 ‘역설적’이었지만, 구원의 진리가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어떠한 의료적 지식과 방법으로도 구명하기 어려웠던 환자가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하느님의 존재와 활동을 부정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 의사가 떠오른다. 반드시 신앙인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성으로 믿을 수 없는 ‘역설(逆說)’을 순수하게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는 겸손한 용기도 필요하지 않을까?

정진만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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