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인터뷰]고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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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돼지가 되어서도 시인이련다… 시 몇편을 꿀꿀 쓰련다

“애기 많이 컸지? 참 세월 빨라. 빨리 둘째 낳아. 오늘 눈도 오는데 막걸리 한 잔 해야지.”
눈 내리던 11월 25일, 고은(80) 시인을 만나 단골 막걸리집으로 향했다. 시인은 파전과 도토리묵, 막걸리 한병을 주문했다. 식당 주인은 선생님이 좋아하는 고추장을 내놓았다. 시인과 기자는 달달한 막걸리로 목을 축이고 나서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나누었다. 그의 말은 시어 같기도 하고, 불경 같기도 해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까닥했다간 낮술에 취해 얼굴만 벌겋게 달아오르는 거 아닌가 싶었다.

지난 8월, 수원 광교산으로 이사 온 고은 시인은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해 보였다. 30년 동안의 안성시대를 마감하고 어렵게, 그리고 복잡하게 새 둥지를 튼 시인은 설레임으로 가득차 보였다. 광교산이 ‘어머니 품 같다’고 했다. 이러한 시인의 심정은 이번 신작 ‘무제 시편’(창비刊)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총 607편, 1천16쪽에 이르는 한국문학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될 만한 묵직한 시집은 두께만 봐서 압도적인 대작이다. 더구나 이 엄청난 시들은 올해 봄부터 여름까지(8월 광교산 이사 다음날까지) 고작 반년 만에 씌어진 것. 이 가운데 539편엔 제목이 없다. 그래서 시집 이름도 ‘무제 시편’. 

“시의 유성우(流星雨)가 밤낮을 모르고 퍼부어내렸다”는 여든 살 고은 시인과의 막걸리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겨울눈은 어느새 겨울비로 변해 광교산을 적시고 있었다. 막걸리 한 잔을 마시는 찰나에도 금방이라도 쏟아져나올 듯 시가 울먹울먹 차 있는 시인에게는 문학이 삶이고, 삶이 곧 문학에 다름 아니다.

불과 반년 만에 총 607편, 수치로 따지자면 하루에 3편꼴로 시를 ‘쏟아’내고도 아직도 멀었다는 시인. 어느 시인은 “세월이 가도 늙지 않는, 여전히 청춘으로 사는 귀신”이라 했고, 또 한 젊은 시인은 “시 없이는 이미 죽었을 사람, 시 있어서 평생 살아남을 사람, 도통 시로밖에 설명이 안되는 천상 시인”이라고 고은을 명명한다.

인터뷰를 마치고 알딸딸한 술 기운이 채 가시기 전에 신작 시집을 사서 읽었다. 찬찬히 읽다보니 여든의 나이에도 폭발하는 열정으로 시를 쓰는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나는 돼지가 되어서도/시인이련다/돼지가 되어서/꿀꿀/구정물 속 주둥이로/새파랗고/샛노랗고/새빨간/새하얀/아흐 새까만/시 몇편을 꿀꿀 쓰련다”(「궁한 날」 부분)

“나는 돼지가 되어서도/시인이련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고은. 그의 광활한 시공간을 거침없이 넘나드는 도저한 사유와 유장하고 분방한 언어가 수원 광교산에서 어떤 색으로, 어떤 말로, 어떤 식으로 물결칠 지 궁금해지는 겨울이다.

Q. 저녁에 서울에서 약속 있으신데 낮술 괜찮으세요?
A. 딱 한 잔만 하자고. 요즘도 기자들이 많이 찾아와. 여기가 딱 좋아. 이 집이 막걸리가 아주 맛있어. 서울 갈 땐 수원역에서 지하철 타고 가면 돼. 사진기자도 한 잔 마셔야지. 그래야 사진을 이쁘게 찍지.

Q. 올해 이탈리아, 남아프리카공화국, 중국, 시베리아 등 세계 시단을 무대로 활동을 펼쳐왔는데 요즘은 좀 한가해지셨는지요.
A. 한가하긴. 이런 인터뷰가 방해야. 오래 구상 중이던 1천500~2천매 분량의 장시(長詩)를 쓰고 있는데 이런저런 일정이 생기다보니 긴 호흡이 끊겨. 나는 서유럽, 남유럽 그리고 남아프리카에 걸친 여러 곳의 뜨거운 무대 위에 찢겨 가 있었어. 시간의 마디마디로는 장시의 지속 율동이 가능하지 않았지. 지난주까진 영국 BBC 방송국에서 와서 내 일거수일투족을 취재해 갔어. 시 4천여 편을 실은 대표시집 ‘만인보’와 신작 ‘무제 시편’을 비롯해 작품세계와 생애, 근황 등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내년 초에 방송할 예정이라고 하던데. 이번주는 부산 강연도 있고. 쉴 새가 어딨어.

Q. 이렇게 일정이 많으면 몸이 지칠법도 한데 어떻게 두 계절만에 시 607편을 쓰셨죠.
A. 시가 그냥 왔어. 시라는 귀빈이 퍼부어왔어. 베네치아에 보낸 80세 절반에 걸쳐 나와버린 것들이지. 하룻밤에 10편도 썼어. 자고 싶은데 시가 못 자게 해. “왜 벌써 오니?” 그랬다니깐. 귀국 후에도 그런 노릇이 시차 따위도 없어진 채 조금 이어졌고 이런 내 시의 행위는 어쩌면 한반도 일대의 빈약한 고대 시가에 대한 후대의 벌충일지 몰라. 듬성듬성한 근대시에의 혈연적인 보강인지 모른다는 것에 어느만큼 연유할 것이다. 나 자신이 나 이전이기 때문이고 나 이후이기도 하기 때문이지. 이번 시집에는 올해 쓴 무제 시편 539편과 안성에서 살던 시대를 마무리하고 수원 광교산 자락에 근거지를 옮긴 후 나온 근황을 담은 부록 시편 68편으로 나눠서 시집을 엮었어.

Q. 1933년생이시니 올해로 만 여든을 헤아리고, 올해로 등단 55년에 이른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 그대로 ‘온몸으로’ 보여주고 계신데 솔직히 체력적으로 힘들지 않으세요?
A. 시와 관련될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나는 거의 동시적으로 아직 덜 자란 삶이다. 그러므로 노년이란 나에게는 비역설적으로 유년이기도 하지. 나는 20대야. 동료 중에는 20대에 죽기도 했고, 30대에 없어지기도 했고, 시 100편 미만으로 쓰고 죽은 이도 있으니 아직까지 시를 쓸 수 있다는 것은 내게 주어진 은총이지. 그들의 결핍을 내가 몸으로 갚아야하는 비극적 사명이 가지고 있어. 그리고 한국문학은 가난해. 세계문학사에서 우리의 위치는 없다. 중국가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지. 치욕스럽기도 하고. 

Q. ‘무제 시편’이라는 시집 제목처럼 시에 제목이 하나도 없어요. 그냥 1, 2, 3, 4 번호만 매겨놓으셨던데.
A. 니(시)들 맘대로 가서 놀아보라는 심정이었어. 내 시는 해방의 언어다. 어떤 명제나 이데올로기나 고유명사에 속해 있는 진술행위는 아니다. 시에게 나는 자기 운명을 개척하도록 자유를 부여하는 의미에서 모든 이름을 지워버렸지. 언어를 놔두고 스스로 어긋나게 하고 싶었지. 스스로 미쳐 날뛰게 하라. 내가 죽은 뒤 혼령이 제목을 붙여 주겠지 뭐.(하하)

Q. 부록 시편에 보면 30년을 살았던 안성에 대한 아쉬움과 동시에 수원에 대한 설레임이 묻어난 시들이 여러 편 있어요.
A. 장소가 운명이고, 작품이 곧 장소다. 안성에 이사 왔을 때 함석헌 옹이 부러워했고 안성에 와서 부부생활을 시작했지. 아이를 낳고 책 백 몇권을 내면서 안성시절이 무르익었어. 안성 30년은 시의 30년이었다. 안성은 너무 많은 신명의 날들이었고, 너무 많은 수혜의 날들이었지. 날마다 절정이었고. ‘안성이여 안녕’이라 시집을 보면 내 이야기가 나와. 광교는 이제 막 태어난 태(胎) 비린내, 젖비린내 나는 어린 삶의 시작이지.

Q. 광교산 생활 100일 정도 흘렀어요. 전입신고 당시 수원 여기저기를 ‘쏘다니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동안 수원 구경 좀 하고 다니셨어요.
A. 점심 먹고 광교산 등산을 하는데 따뜻한 엄마 품 같아. 우선 자연부터 친해지려고 노력 중이야. 구름의 신, 나무의 신, 꽃의 신과 교류한 후 그 다음에 물길따라 다닐 생각이야. 수원천을 따라서. 마지막이 인간이 살고 있는 거리과 길로 나갈 거다. 광교산에 와선 그냥 시가 잘 나와.

Q. 선생님께 수원(광교산)은 어떤 도시인지요.
A. 의례적으로 좋다, 싫다고 대답하고 싶지 않아. 좋다. 세상은 어느 곳이든 다 좋다. 광교산은 시인으로서 열매를 맺어야 하는 곳이며, 꽃을 피워야 하는 곳이기도 하지.

Q. 선생님께 시란 어떤 의미인가요.
A. ‘죽을 때도, 죽어갈 때도 시를 쓸 수 있어?’라고 내가 나에게 묻는다면 ‘쓸 수 있다. 쓸 수 없다면 죽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답할 것이다. 시는 절경(絶景)의 꽃이 아니다. 폐허의 꽃이다. 폐허야말로 유적(遺蹟)이야말로 시의 미지(未知) 그것이지. 나의 길은 더 가야 할 시의 길이다. 또한 이 길은 속박조차도 자유인 그 길이다.

Q. 내년에도 해외 체류 계획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A. 요즘도 해외초청이 쇄도하고 있어. 독일 베를린에서 초청을 받았고, 파리고등사범학교에선 한국문학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도 받았어. 광교산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어찌 가겠어. 당분간은 광교산에서 작품 쓰는데 집중할거야. 수원을 주제로 한 시를 쓰고 있는데 내후년 봄엔 책으로 낼 예정이야. 인터뷰는 여기까지 하지. 서울 일정이 늦었네. 그래도 마시던 건 다 마셔야지. 아이고 사진기자 얼굴은 꽃이네, 꽃이야.(하하)
강현숙기자 mom1209@kyeonggi.com
사진_추상철기자 scchoo@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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