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6인의 스승

나의 초창기 독일에서의 학문과정은 깜깜한 암흑속에서의 헤매임과 같은 것이었다. 이는 언어의 커다란 장벽도 있었지만, 실은 나의 학문적 미숙이 더 큰 문제였었다. 당시 나는 독일법학과의 학제에 짓눌려 끌려가는 형국으로, 혼란과 무기력 그리고 두려움속에서 많은 밤을 지새워야 했다. 특히 학기의 성패를 가름하는 레포트를 작성해야할 방학기간은 늘 홀로하는 외로운 싸움의 시간이었다. 1989년 여름방학 역시 3개월짜리 레포트작성을 위해 받쳐져야만 했다.

그때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주유소에서 주유를 마치고 그냥 줄행랑을 친 사건에 대한 법해석을 요하는 형법문제였는데 1심에서 단순하게 절도죄가 적용됨으로써 격렬한 법적논란을 야기시킨 이 사건은 즉각 2심에 항소되어졌고,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에게 과제로 주어진 상태였다. 쉬운 듯 하던 문제는 시간을 더할수록 나의 기존 법적지식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가만 증명한채 미궁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당시 이 문제는 학계의 지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킬 만큼 학문적 가치가 있는 것이어서 이 사건에 대한 법적 해석을 위한 많은 의견들이 개진되었고 그 중 횡령죄를 적용한 한 교수의 논리전개는 상당한 주목을 받게 되었고 나또한 그 빈틈없는 논리에 공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곧바로 이어진, 행위의 형사상 무죄를 주장하는 또 하나의 완벽한 논리적 반박은 내가 지금까지 믿었던 진리에 의문부호를 첨가시키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완벽은 일주일 또는 3∼4일을 주기로 반복되는 다른 주장에 의해 또다시 무참히 무너졌는데 내 기억으로는 6명이 참여한 이러한 논쟁은 당시 모두 유명한 학자들인 상대방의 실명을 거론하며 논리의 허실을 예리하게 지적하는 매우 격렬한 형식으로 진행되어 내게는 상당히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결국 그러한 논쟁을 통해서 그들은 내게 무엇보다도 문제의 접근방법과 논리전개방식, 숲과 나무를 동시에 보여줌으로써 판단의 균형감각을 유지하는 기교, 또한 법언어의 불완전성, 법률체계 보완의 필요성과 그 방법을 보여줌으로써 법학에 눈을 뜨게 만든, 학문의 방법을 전수한 진정한 스승들이다.

이제 내 자신이 부족하나마 한사람의 학자로서의 소명을 받고있는 지금, 나는 그들이 서로의 진정한 학문의 동반자였음을 실감하면서 그러한 논쟁을 향유하는 학문풍토가 은근히 부러워지는 것이 사실이다.

시끄러운 거리의 소음과 매우 부산스럽게 돌아가는 사회현상에 비해 다분히 형식적인 논쟁으로 일관하는 우리 학문풍토의 정숙함은 아주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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