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처럼 흘러 가리라
김현옥<시인·수원 수일중 교장>
필립 시몬스, 주옥같은 수필과 단편소설을 발표하며 장래가 촉망되던 문인이었던 그는 35세의 나이에 루게릭이라는 병에 걸려 5년밖에 못산다는 의사의 선고를 받게 된다. 루게릭병이라면 천문학자 스티븐 호킹이 앓고 있는 바로 그 병이다. 온몸의 근육이 무력해지는 근무력증을 앓으면서 저자는 ‘한번에 찻숟가락으로 하나씩 생명력을 덜어내는’ ‘느리고 성가신 폭력’앞에서 8년을 더 살게 된다. 그 느리고 성가신 폭력 앞에서 저자는 “루게릭병에 걸렸다는 진단이 나를 유별나게 만들었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인간의 삶은 어차피 죽음을 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인식한다는 점에서 축복받은 삶이다. 나는 진정코 그것을 축복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삶의 생기와 환희를 알기 전에 유년기를 병마에 시달렸다. 열 살을 넘기지 못하고 죽을 거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이런 병 저런 병 다 앓았다. 나의 몸은 갖가지 병원균들의 서식처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벌레(바이러스나 세균들)들에 대한 두려움이 전이되어 그런지 지금도 벌레라는 벌레는 끔찍이 무서워한다. 겨우 몸을 추스를 정도가 되자 나 대신에 아버지가 힘든 투병생활을 하시게 되었다. 엄마와 함께 생활에 지치고 주눅든 가족들을 돌보면서 그리고 밤마다 아둔한 나의 인식능력에 절망하면서 소년기를 보내었다.
비슷한 또래의 여자애들이 외모를 가꾸고 포장하면서 백마를 탄 왕자를 꿈꾸는 시절에도 나는 ‘위로 향하는 타락’으로 끊임없이 발돋움하고 발버둥치면서, 나를 살리기 위해 비상하는 법, 추락하는 법을 터득하려고 하였다. 당시에 나는 코끝으로 죽음의 비린내를 맡으면서 죽음을 두려워하고 그리워하고 미워하고 사랑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20, 30대가 가고, 40대도 가버렸다. 이제 50대 중반에 들어서니 죽음의 문제가 더더욱 편안하게 다가선다. 죽음의 문제는 앞으로 남은 시간들 속에서 나의 친구요 삶의 화두가 될 것이다. 죽음을 생각하면, 모든 욕구나 욕망이 다 부질없다고 느껴진다. 물처럼 흘러가리라 마음먹는다. 죽음을 생각하면, 지금-여기, 내가 만나는 모든 존재와 사람들이 그렇게 절실하고 고마울 수가 없다. 오늘 내 몸을 괴롭히고 있는 이 신열과 고통조차도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요즈음 나는 고통과 슬픔, 무기력감과 허무감, 권태와 고독, 죄와 업 그 모든 것을 다시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 또한 나는 오늘 기쁨과 환희, 갈애와 집착, 아집과 편견을 다 놓아버리고 있다. 놓아버리는 법을 체득하고 있다.
어떻게 우아하게 떨어질 것인가. 작가는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떨어지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놓아버리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그 놓아버림은 포기나 체념과는 다른 것이라고. 작가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내 병에 대한 진단을 받기 전에는 사는 것이 따분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하루하루가 의미있고 가치있는 나날이 될 테니, 이 얼마나 행복한 노릇인가”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으니 더 잃을 것도 없고 아무 것도 원하지 않으니 모든 것이 축복이다. 소멸하는 것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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