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옛소리 기행/(51)아이들에게 우리의 '옛소리'를...

소리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우리 민족은 더더욱 그러하다. 삶과 소리를 떼어놓고는 이야기 할 수가 없을 정도다. 누구나 다 그런 것을 공감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대개의 사람들은 수긍을 한다.

소리가 없는 삶, 어찌 보면 참으로 무의미할 것만 같은 것도 우리 민족의 정서 때문이라고 본다. 과거 제천의식 때부터 우리 민족은 하늘에 감사하는 모양으로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고 모두가 하나로 어우러져 3일 밤낮을 쉬지 않았다고 한다. 고구려의 동맹(東盟)이 그러하고, 예의 무천(舞天)이 그러했으며 마한의 영고(迎鼓)가 그러했다. 이러한 풍습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예외는 아니다. 비록 소리의 형태가 다르고 노는 방법이 다르다고는 하지만 우리 민족은 어디를 가나 모여들면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춘다. 가끔씩 술이 취해 낯뜨거운 모습들을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얼굴을 외면할 만한 일이 생기기도 하지만 좋은 시각으로 본다면 그리 큰 일도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렇게 많은 소리들을 하는 민족이 언젠가부터 우리의 소중한 소리를 다 잃어버리고 그저 출처가 불분명한 소리에 빠져 점차 망가져 가고 있다. 사회가 망가지고, 학교가 망가지고, 가정이 망가져 가고 있다. 좋은 소리만을 고집해도 견디어 나가기가 힘들다는 요즈음인데 이 소리 저 소리, 된소리 안 된소리, 그저 소리라는 소리는 다 모여들어 이 땅의 소리문화를 오염시키고 있다. 그것도 무슨 국제화가 좋은 것인줄 아는가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점에 분명히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우리 것을 잃어버리고, 내 것을 소중히 생각하지 못하는 그런 민족이라면 참으로 세계무대에서 낯뜨거운 꼴이 아닐는지…. 남들은 다 자기 것을 갖고 나와 자랑을 하는데 유독 우리만 남의 것을 갖고 잘한다고 하면 그 또한 잘못된 사고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언젠가 친근한 목회자 한 분이 독일의 모임에 갔다가 곤욕을 치른 일이 있다고 푸념을 하시는 소리를 들었다. 세계 각국의 목회자들이 모여 다 자기 나라의 악기를 들고 나와 연주를 하는데 혼자만 피아노를 갖고 음악을 했더니 ‘그 나라는 음악이 없느냐’ 는 소리를 듣고 얼마나 낯이 뜨거운 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하면서 그 뒤로 단소(短簫)를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았다. 이후 그 목회자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단소를 들고 나가 연주를 해 큰 박수를 받았다고 한다.

우리는 우리 것에 대해 너무 무지하다. 그저 우리 것은 모두 불량품이나 골동품 정도로 알고 있다. 외국의 것이라면 ‘개똥도 보약’이라는 문화적 사대주의가 이 나라의 정신을 병들게 하고, 육신을 병들게 만들었다. 현대는 개성시대라고 한다. 남이 무엇이라고 하든지 내가 좋으면 그만이다 라는 사고방식이 우리 주위를 황폐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우리 민족의 정서는 나 하나가 아닌 ‘우리’라는 개념이 앞장서 있었고 그런 마음가짐이 ‘공동체’라는 대단한 단결심을 불러 일으켜 나라가 어려울 때 스스로 이겨내고, 가정이 파탄 날 지경에도 먼저 가족을 생각해 슬기롭게 대처해 나가는 지혜를 얻은 것이다.

지금 우리 아이들의 모습을 보자. 키도 커지고 얼굴도 서구화 되어 잘생겼다고 한다. 글쎄다, 키가 크고 얼굴이 잘났다고 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현재 모든 것이 서구화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라면 예전의 ‘칠척장수(七尺將帥)’들은 모두 서구화가 된 것일까. 그저 억지 소리로 들리기도 하겠지만 요즘 아이들은 비만이 심해지고 성인병이 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고민을 해야할 때가 왔다고 본다.

무조건적인 국제화라면 이는 망국병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기초가 튼튼치 못한 사상누각(砂上樓閣)이 얼마나 오래 버틸 것인가. 자신의 본분도 잊고, 자신의 출신성분도 불분명한 소리를 하는 요즈음의 아이들이 과연 무엇을 어떻게 알고 나라를 알고, 이웃을 알고, 가족을 알겠는가. 이즈음 심각하게 생각해 볼 문제다.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무엇을 먼저 시작해야 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할 때다.

어느 기사를 보니 우리 나라 음악교과서에 우리 전통에 대한 내용은 고작 몇 분의 일도 안된다고 한다. 왜 그래야만 할까. 이제는 교육마저도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우리 아이들에게 내 것을, 그리고 우리라는 개념조차 알려주지 못한 채 무조건적인 국제화만 부르짖는다면 과연 우리 아이들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며 우리라는 공동체를 알 것인가? 매일 정체성 운운해 가면서 말로만 할 것이 아니고 이제는 조금이나마 우리 것을 알려주고 우리 것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워 주자.

어느 누군가가 이런 이야기를 한 말을 들었다. 물론 검증이 된 이야기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난 그럴 것이라고 확신을 한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우리 전통음악이나 악기를 배운 아이들이 진학률도 훨씬 높고 모두가 정서적으로 안정이 되어있어 모범생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저 시끄럽고, 있는 대로 흔들어 대고, 소리를 있는 대로 질러대면서 무슨 정서적으로 안정이 될 수가 있겠는가. 이제는 우리 아이들에게 진정한 사랑의 소리를 들려주었으면 좋겠다.

멍멍개야 짖지마라 우리아기 잠깨울라

꼬꼬닭도 울지마라 우리아기 잠깨울라

어허둥둥 우리아기 우리아기 잘도잔다

금자동아 은자동아 우리아기 얼뚱아기

하늘에서 떨어졌나 땅속에서 솟아났나

금을준들 너를사랴 은을준들 너를사랴

어허둥둥 우리아기 우리아기 잘도잔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이보다 더 사랑을 나타낼 수 있는 말이 세상에 또 무엇이 있겠는가. 어머니들이 아이들을 안고 어르면서, 혹은 업고 엉덩이를 토닥거리면서 부르는 자장가는 세상의 어느 소리보다도 아이들에게 사랑을 가득 담은 소리일 수밖에 없다. 이런 소리를 듣고 자라는 아이들은 모두 정서적으로 안정이 되어있었다는 것이다.

우리아기 착한아기 어허둥둥 우리아기

나라에는 충신동이 부모님께 효자동이

형제간에 우애동이 이웃간에 화목동이

우리아기 잘도잔다 우리아기 잘도잔다

그저 부르는 소리다. 특별한 곡조도 없다. 아이에게 사랑으로 소리할 뿐이다.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자식에 대한 사랑이 그대로 표출된다. 그리고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대로 소리 안에 담겨있다. 이러한 소리를 잊은 지금 아이들은 너무나도 황폐화 되어있다.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TV에서는 선정, 폭력이 난무하고 컴퓨터 게임에서는 살인과 폭력이 저질러진다. 이런 것을 보고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바랄 것인가. 이제는 정신을 차리고 우리 아이들에게 삶의 소리, 사랑의 소리, 어머니의 가슴에서 울려지는 소리를 들려주어야 한다.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소리. 우리가 이 시대에 진정 우리 아이들에게 알려주어야 할 소리다. 가만히 생각해 보자. 우리 아이들이 모질어지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인지…. 바로 우리 소리를 잃어버리고 만 때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무엇을 더 망설이랴. 이제 우리 아이들에게 새 생명의 소리를 들려주자. 가슴에서 가슴으로 이어지는 소리를.

글/하주성(민속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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