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역사 (歷史)의 교훈

연천군 미산면 마전리 삼거리에서 숭의전으로 넘어가는 고개 즉 염창골 고개를 넘어서면 왼편에 초라한 무덤이 하나 있다. 사실 그 앞에 아무렇게나 세워 놓은 비석만 아니면 누가 무덤이라고 생각하겠는가. 그 무덤은 초대 숭의전부사(崇義殿副使)를 지낸 왕순례(王循禮)의 무덤이다. 필자는 숭의전을 오갈때마다 마주치게 되는 왕순례의 무덤에서 인간사 무상함을 느낀다. 태조 왕건의 후손들이 건재한데도 불구하고 저기 누워 계시는 저 분은 죽어서도 이런 대접을 받는 것일까? 살아서는 많은 부귀영화를 누렸던 분인데…

조선왕조실록에서 왕순례에 관한 기록을 읽다 보면은 한 인간의 드라마틱한 인생사를 보는 것 같다. 고려가 망하고 나서 충청도 공주에 숨어살던 왕우지(王牛知)는 어느날 갑자기 자신들을 핍박하던 조선의 왕(문종 2년· 1452) 앞에 불려나가 이름을 왕순례라 고치고 종3품 벼슬의 숭의전부사에 임명된다. 나라에서 숭의전이 있는 마전군에다 집을 지어주고, 양가의 딸과 혼인을 시키고 노비 15명에 제사를 도와줄 수복(守僕) 6명과 기름진 땅 10결(약 30,000평)을 받는 등 그야말로 금시발복(今時發福)의 편안한 삶을 살게된다.

그렇게 7년을 잘 보내고 있는데 나라에서 갑자기 숭의전부사의 벼슬을 거두어 간다(세조 7년·1459). 벼슬을 앗아간 이유가 “본처를 박대하고 첩을 매우 사랑하고 있으며 또 거주하는 백성을 침학하고 방자하게 행동하면서 거리낌이 없으니 공경하고 근신하는 뜻이 조금도 없습니다. 청컨대 사헌부로 하여금 그 첩을 이혼시키고 왕순례의 직첩을 회수하여 징벌하도록 하소서.(세조 7년·1459)” 세조는 왕순례로 부터 벼슬을 거두었다가 4년 뒤에 벼슬을 돌려준다. 그리고 나라에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불러올려 다독 거리면서 벼슬을 종3품에서 종2품으로 올려주기도 한다.

세조에 이은 성종 때에도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마다 한양으로 불러 올려 빈객의 예우를 다해주는 등 영화를 누리게 되지만 왕순례는 성종 16년(1485)6월에 죽는다. 그가 묻힌 묘는 몇 백년이 흐르는 동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가 최근에 와서 고갯길을 확장하면서 묘비가 발견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다. 필자는 왕순례의 경우를 보며 우리네 선조들이 그토록 역사를 두려워했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를 통하여 후대의 평가를 받고 동시에 현재의 삶속에 후대 사람들을 의식하며 살아야 하기 때문에 역사를 두려워 했던 것이다. 역사에 가정이란 있을 수 없지만 어느날 갑자기 부귀영화를 누리게 된 왕순례가 자신의 불행했던 과거(?)를 생각하며 선대를 공경하고 신중히 행동하였다면 권력을 남용하고 백성을 괴롭히며 안하무인격으로 방자하게 행동한 사실이 역사서(조선왕조실록)에 고스란히 기록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의 무덤이 오늘날과 같이 초야에 묻혀 돌보는 이 없는 신세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역사적 교훈은 비단 왕순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며 몇 백년 아니 수천년의 역사 속에서 수없이 반복되는 교훈이기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그러한 역사의 교훈을 염두에 두고 각자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후대에 부끄럽지 않은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최병수.연천문화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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