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저녁으로 제법 차게 느껴지는 바람이 옷깃을 파고든다. 서늘한 바람의 시작은 추운 겨울의 예고이고 가진것 없는 영세민들의 걱정이 앞서는 계절이기도 하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추워지면 홀로 살아가는 늙으신 어르신들이 힘들어진다. 누구하나 돌보아주는 사람없이 노구를 이끌면서 어렵사리 세상을 살아가는 어른들 말이다. 현재 나날이 증가되고 있는 노령인구에 대하여 정부가 어떻게 대책을 세워 나갈지 걱정스럽다.
늙으신 부모가 고생하며 길러주고 가르쳐 준 자녀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군수로 재임중 관내를 순회하다가 칠순 잔칫집에 들러 축하의 말씀을 드린 일이 있었다. 동리 어른들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칠순잔치 하는 분 친구의 부탁을 받았다.
두내외가 늙은 몸을 이끌고 작은 논밭에서 나오는 식량으로 연명하고 있는데, 생활하기 무척 어려우니 군수가 영세민 생활자금을 지원하여 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왜 우리 공무원들은 이런 딱한 사정의 어려운 분들을 찾아 자발적으로 정부가 시행하고 있는 각종 혜택을 나누어 주지 못하고 있을까 궁금하였다.
“어르신, 이장이나 공무원에게 딱한 사정을 말씀해 보신 적 있습니까?” “그럼했지. 그런데 나는 해당이 안된다고 거절했어” “그러면 자녀들이 있습니까?” “아니, 나를 도와주는 자식은 하나도 없어. 주민등록에도 자식이 없어.”
돌아온 즉시 호적등본을 발급받아 보았다. 아들이 셋이나 있었다. 모두 40대였다. 다음날 그 영감을 다시 만났을때 그는 순간 안색이 변하면서 고개를 숙이며 자기 아들들에 대해 실토를 하는 것이었다. “내가 젊은날에는 황소를 두마리씩 키우고, 논도 5천여평이나 있어 동리에서 인정하는 부자였지. 내가 배우지 못하여 한글도 못읽는 한을 풀기위해 아들을 위해 소팔고 논팔아 온 정성으로 아들들을 공부시켰어. 큰아들은 우리집 기둥이니 대학까지 가르쳤지. 공부도 잘하고 시골에서 있기가 아까우니 서울로 유학 보내라고 해서 중학교 때부터 부모 곁을 떠나 있었지. 작은아들들은 여기 농촌에서 고등학교를 마쳤어. 아이들을 가르치다보니 소도 없고 땅도 얼마남지 않게 되었고 아들들은 모두 집을 떠났어.”
그 노인의 말은 계속되었다. 큰아들은 하기 어려운 유학시험까지 합격하여 미국으로 건너갔고 그곳에서 40년이 지나도록 한번도 부모를 찾아오지 않았단다. 작은 아들들은 모두 도시에서 생활하면서 설, 추석 명절에 내려오기를 마지못하여, 하루전에 오는것이 아니고 당일 아침 일찍 내려와 아침식사를 하는둥 마는둥 먹고 직장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다시 돌아가는 처지라는 것이다. 늙으신 부모의 방은 찢어진 창호지 문에 퀴퀴한 늙은이 냄새가 나고 반찬 없는 식사는 입맛에 안맞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제발 도와 달라는 애원이었다.
어떻게 할까. 우리 주위에는 잘난 자식을 둔 부모님들이 인생 말로를 더욱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것을 종종본다. 공부 많이 시키는 것을 부모의 책임으로 알고 있는것 없는것 모두 팔아 자식에게 다 주고 지금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자식들은 내가 잘나서, 내 능력이 출중해서 지금 누리고 있는 만족은 부모님 은덕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시 찬바람이 불어오니 그 영감님 내외분 생각이 난다. 어르신들을 한번 생각 해본다. 뒷동산에 올라 나뭇가지 걷어다 방 불을 피우는 농촌의 어르신들이 늘어날까 걱정이 앞선다. 젊은이들은 너나 할것 없이 도시로 떠나니 혼자 사시는 노인들은 누가 돌볼수 있을지 안타깝다. 왜 세상이 이렇게 변하여 가는 것인지 슬픈 현실이다.
/김 선 흥
안양대 생활법률학과 교수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