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되었다. 연말에는 많은 사람들이 을씨년한 추위를 더욱 느낀다. 일년동안 미루었던 일들이 정리되어야 하는 기한이기 때문이다.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난감하고 침통해질 수 밖에 없다. 억지로라도 잊어보려고 망년회를 한다지만 그것도 소용없는 일일 뿐이다. 더이상 미루어볼 기한이 없으니 떳떳하게 연말을 보내게 되기는 어려운 일이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하늘을 향해 한점 부끄럼이 없는 개운한 연말이었으면 좋겠다. 행복한 것은 진실로 떳떳해 졌을때만 얻어질 수 있는 기쁨이다. 행복하고 싶거든 현재 자신의 삶이 얼마나 떳떳한가를 냉정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연말기분을 내고 흥청거리기보다는 한해의 마무리가 얼마나 떳떳한 연말로 맞이했는가를 되돌아 보아야겠다.
대한민국 국민은 모두가 빚을 지고 산다는 뉴스를 들은 적이 있다. 세상에 태어나는 아기에게도 채무를 지고 나온다고 햇다. 무슨 빚인줄도 모른채 탯줄처럼 목에 감고 평생을 따라 다닐 것이다. 대통령도 외국에서 빚을 얻어다가 나라 살림을 해야하니 그 또한 국제 채무자이다.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들 조차도 무서운 카드빚으로 묶여진채 앞길이 가로막혀 잇다. 무모하게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더욱 헤어나올 수 없는 빚들이 끈끈한 거미줄처럼 자신들의 손발을 묶어 버린다.
옛날에 가난했던 시절들은 의식주에서 비롯되었다. 보릿고개를 넘긴지가 반세기도 지나지 않았는데 그때보다 빚은 더 많아 지고 있다. 그것은 가난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낸 재난이고 스스로 가중시킨 가난이 된 것이다. 개인이나 국가가 모두 분수모르고 일찍 터뜨렸던 삼페인의 유혹때문이었다. 수습되기에는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다시 재기하기에는 많은 상황들이 가로막고 풀리질 않는다. 연말이 가까워올수록 암담해지는 것은 나 혼자만의 고통은 아닐 것 같다.
나는 여러차례에 걸쳐 세상과의 작별을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것은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부진한 사업에 걸쳐 남편이 시작한 자동차 부품 제조공장이 난관에 부딪쳤을 때이다. 대기업의 잇단 파업으로 차질이 생기면서부터 갑자기 밀어닥친 자금사정은 돌파구를 찾을 길이 없었다.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때 이후로 연말을 두려워하는 공포증은 계속되었다. 일년내내 미루어왔던 일들이 연말을 약속으로 지켜지질 않았다. 모든 것이 허탈하고 죽고만 싶었다. 나 하나만 눈감으면 끝날 것 같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죽어버리는 것으로 해결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무서운줄 모르고 질주하던 자동차의 브레이크가 파열되는 순간과 같은 연말들이었다. 다시 일어나 보려고 허우적대면 더 깊은 수렁속으로 빠져들어갈 뿐이었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목을 조여드는 고통을 참아내며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몇 년이 지난후에야 터널속에서 밖을 바라보는 용기가 조금씩 생겼다. 어두운 터널속에 갇혔던 절망에서 입구를 찾는 희망은 빚을 갚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소망을 싹트게 했다. 형편이 허락하는대로 조금씩 부채를 정리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아직도 떳떳한 연말을 맞이하기에는 더 오랜 시간이 지나야 될 것 같다.
떳떳한 연말을 보내고 싶은 소망은 누구나 간절하다. 그러나 현실은 뜻대로 되어주질 않는다. 조금씩 여유의 마음문을 열고 남은 날들을 기대해 보아야 겠다. 지난해보다는 금년이 좋아진듯하고 올해보다는 내년의 연말이 훨씬 떳떳해질 것이다. 내년은 갚는 기쁨을 누리면서 살고 싶다. 빚도 갚고 은혜도 갚고 마음에 섭섭했던 모든 것을 갚게 되었으면 좋겠다. 자신이 떳떳해졌을때만이 완전한 행복이 될 수 있음을 깊이 느낀다. 비록 이번 연말은 힘들고 쓸쓸해도 내년을 기대하며 웃어보고 싶다. 모든 것이 떳떳해지는 날, 그날의 행복을 향해 희망의 페달을 힘껏 밟으며 달려갈 것이다.
/최소영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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