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27만년전 선사인을 만나다/ 전곡리의 아슐리안형 석기

세계 고고학 정설 뒤집은 ‘전곡리안’

우리나라 최고의 선사유적으로 최고 35만년전까지 올려다 볼 수 있는 전기 구석기유적인 전곡리 유적은 국내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뿐 아니라 세계 고고학 개설서에도 빠짐없이 등장하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다.

전곡리에서의 아슐리안형 주먹도끼의 발견은 세계 고고학계를 깜짝 놀라게한 사건으로 여러가지 의미를 지닌다. 동아시아 구석기문화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됐는가 하면, 세계 각지 구석기 유물의 다양성에 대해서 재고하게 했다.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는 1940년대 세계 고고학계를 주도하던 석학 모비우스(미국 하버드대 교수)가 구석기시대의 문화발달 수준을 판정하는 기준으로 이용하는 근거가 됐다. 주먹도끼를 사용했던 아프리카·유럽지역과 사용하지 않았기에 후진성을 면치못했다는 동아시아권으로 양분, 인류기원의 우열을 가르던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이 세기의 학설이 정설로 굳어져 오던중 전곡리의 아슐리안형 주먹도끼 발견은 ‘모비우스 학설’을 뒤집으며 치명적인 손상을 입혔고, 대대적인 수정을 가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유럽·아프리카뿐 아니라 동아시아에서도 구석기문화가 존재했다는 획기적인 사실이 밝혀짐은 물론 세계 고고학 지형도를 바꾸며 전곡리를 동아시아의 대표적인 구석기문화 유적지로 지명하기에 이르렀다.

근래에는 국내 고고학계를 중심으로 아슐리안 문화에 대비되는 ‘전곡리안’이라는 고유명사까지 등장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우리나라가 갑자기 세계 고고학계의 주목을 받자 일본에선 ‘구석기유적 조작’이라는 해프닝이 벌여져 세계적인 웃음거리가 됐다.

2000년 11월초 일본 마이니치신문은 미야기현 기마다카모리 유적발굴 현장에서 고고학자 후지무라 신이치가 가짜 석기를 파묻는 장면을 찍은, 이른바 몰래 카메라를 폭로했다.

후지무라가 자작극을 연출한 이면에는 한국의 전곡 구석기유적 발굴이 있었다. 27만년전의 구석기 유적이 한반도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전곡리 유적지가 발굴되자, “한반도에 있는데 일본에 없을 리 없다”고 초조감을 드러낸 일본학자들이 구석이 유적을 찾기에 혈안이 된 것이다.

그 결과 1981년 일본 미야기현(宮城縣) 자자리기 유적에서 약 4만년전의 구석기를 발굴해 일본 최초의 구석기 유적의 존재가 밝혀졌고 국가사적으로 지정했다. 이 유적을 발굴한 도후쿠(東北) 구석기문화연구소 후지무라 부이사장은 그후 계속해서 20만년전~40만년전~50만년전~70만년전의 구석기 유적 발굴을 잇달아 발표해 일본에서는 ‘신의 손’으로 알려질 정도였다.

이러한 구석기의 발굴은 일본 구석기가 중국과 한국의 역사에 뒤질 수 없다는 그릇된 사관에 젖은 일본의 자존심을 세워 주었고 세계 역사상 일본의 우월성을 내세울 수 있었기에 일본 국민들은 열렬히 환영했다. 그런데 이 모든 영광이 후지무라의 자작극으로 드러나 결국 세계적인 망신만 당했다.

우리의 전곡리 유적은 이처럼 일본을 자극해 스스로 무덤을 파는 자작극을 연출하게 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동시에 일본 교과서 왜곡의 근간에 흐르고 있는 우월주의적 황국사관이 낳은 결과임을 증명한 셈이 됐다.

만약 마이니치신문의 유적조작 폭로가 없었다면 일본의 구석기 왜곡은 영원한 진실로 믿게 되었을 것이다. 이 사건은 고고학이 문화우월주의에 편승하면 조작극에 희생될 소지가 있다는 교훈을 남겼고, 아울러 고고학의 올바른 자세가 무엇인가를 되돌아보게 했다.

1979년 1차부터 2001년 11차까지 발굴작업에 참여한 한양대 배기동 교수는 전곡리 구석기 유적지가 중요한 이유를 크게 세가지로 요약했다.

“첫번째는 가장 핵심인 아슐리안형 주먹도끼가 발견됐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유적의 층위보전이 대단히 잘되어있다는 점이며, 세번째는 이러한 유적의 구조가 상당히 광범위한 지역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배교수에 의하면 전곡리 유적의 지표와 발굴 조사에서 채집된 석기의 수는 엄청나게 많다. 대략 5천여점으로 석기공작은 전체적으로 아슐리안형의 석기에도 불구하고 석기 가공이 적고 형태적으로 정형성이 높지않은 특성을 관찰할 수 있다. 석기들은 대체로 한탄강이나 임진강에서 흔히 있는 석영맥암이나 규암 등의 강 돌을 사용한 것으로 보고있다. 다른 종류의 석재로 이 지역에서 흔한 현무암이나 편마암도 약간 포함돼 있다.

석기들중에 큰 석기로는 아슐리안형 주먹도끼와 가로날 도끼, 찍개류, 대형 긁개, 다각면 원구 등이 있다. 아슐리안 주먹도끼는 위는 둥글게 다듬고 아래는 뾰족한 날이 서도록 깍으면서 날 옆면은 우둘투둘 한 날이 겹겹이 서도록 돌 둘레를 쳐내서 만든 형태를 일컫는다. 이는 동물의 가죽을 벗겨내는데 아주 유용한 것이었다.

전체 석기중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류가 숫적으로 차지하는 비중은 극히 적은 편이며, 이 주먹도끼들은 크게 첨두형과 타원형 두 형태로 나뉘는데 세부적으론 훨씬 다양한 모양을 관찰할 수 있다. 박편을 이용한 것과 강 돌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 있는가 하면, 양면 가공한 것과 단면 가공한 것이 있다. 단면가공한 것들 중에는 몸통이 두터워서 피크류로 판단되는 것이 다수 있다.

전형적인 아슐리안처럼 전면을 양면가공한 것들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대체로 박편을 큼직하게 떼어내어 가공한 것들이 많은데 이러한 점과 몸통이 굵다는 점에서 아프리카 상고안과 비견되기도 한다. 그래서 정영화·배기동 교수 등은 전곡리 구석기공작을 서구의 아슐리안과 구분해 ‘전곡리안’이라 부르기도 한다.

다각면 원구는 공모양에 가까운 것에서부터 불규칙 다면체까지 다양하며 대부분 한면에서 삼면까지의 자연면이 남아있는 것이 특징이다.

소형 석기로는 긁개가 많이 나타나며 이외에도 홈날이나 톱니날, 부리날, 첨두기 등의 석기도 보인다. 전체적으로 소형 석기들은 전형적이고 규칙적인 형태를 다듬은 경우는 많지않고 최소의 가공으로 만든 날을 갖고있는 불규칙한 형태라 할 수 있다. 박편이나 비정형적인 석편을 이용해 만든 경우가 많으며 드물게는 강 돌을 그래도 사용해 만든 것도 있다.

전곡리에서는 다양한 단계의 석핵들이 발견됐다. 석핵은 석기제작기술의 중요한 측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사람 머리 크기의 석핵에서부터 둘 셋 정도의 박편흔이 남아있는 초기 단계의 석핵, 소형 주산알 모양의 양면뿔석핵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박편은 평면이 불규칙한 것들이 많고 길이가 짧은 가로박편들이 다수다. 평평한 자연면이나 박리면을 타격면으로 사용한 것들이 많고 일부의 것은 모서리를 타격면으로 사용한 것들이 포함돼 있다.

배기동 교수는 “전곡리 유적은 그 중요성이나 의미는 상당하지만 아직도 풀어야할 연구과제들이 많다”며 “이를 위해서는 여러기관에 흩어져있는 전곡리 구석기 공작들을 한자리에 모아 분석하는 작업이 필요하고, 또한 지속적으로 토양과 층위에 대한 분석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글·사진/이연섭 문화부장 yslee@kgib.co.kr

김추윤 신흥대학 교수·지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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