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전국민의 가슴을 울린 사건이 있었다. 대한민국의 건장한 청년이 먼 타국에서 불미스러운 일을 당한 것이다. 전국적인 추모의 물결이 이라크 테러집단의 반인륜적인 행위에 분개하고 한 청년의 죽음에 슬퍼하였다. 파병에 대한 찬반이라는 정치적인 분열상을 차치하고서 우리는 먼저 인간의 권리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인권에 대한 인식이 확고한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것은 우리 사회의 자양분을 윤택하게 만드는 동시에 전지구적인 공동체의 보편적인 규범을 만들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미국에 의한 이라크 전쟁의 대의명분은 테러에 대한 대응과 자국민에 대한 인권침해 상황이었다. 코소보, 동티모르 그리고 시에라리온에 대한 국제사회의 개입은 모두 정당하지 못한 인권에 대한 침해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러나 과연 모든 인류가 단일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인권에 대한 합의가 있었던 것일까? 선진국이자 강대국인 서구의 일방적인 가치관을 다른 문화를 가진 사회들에 보편적으로 강제하기 위한 행동은 아니었을까? 이러한 의문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통하여 오늘의 현실을 우리는 직시해야만 한다.
인권에 대한 서구의 개념은 크게 두 가지의 주류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 하나는 개인의 생명, 자유, 재산을 포괄하는 재산권에 대한 자유주의적인 시각으로부터, 다른 하나는 개인의 정치적인 참여를 중요시하는 정치적 권리로서의 공화주의적 전통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의 개념으로부터 인권이 형성된 것이다. 정치적으로, 신체적으로 자유로운 인간이 바로 이러한 인권개념에 의한 보호를 받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모든 전지구적 공동체에게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싱가포르의 경우 아직도 태형, 즉 곤장을 치는 제도가 있다. 미국은 이러한 형벌에 대해 인권을 침해한다고 하지만 그들은 그 나름의 법제도를 통하여 자국민을 보호하고 사회의 안정을 유지하고 있다. 만약 이러한 규범이 모두 인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면 왜 국제적인 개입이 싱가포르에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일까? 그렇다 인권이라는 것은 그 사회의 공동체가 오랜 역사를 통하여 인정하고 있는 자기보호를 위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때문에 한 가지 가치를 모두에게 강요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이러한 입장이 인권을 편의적으로 해석하자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누릴 권리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이 자기에게는 관대하게 적용되고 남에게는 인색하게 적용돼서는 안된다. 인간의 권리를 동등하게 인정하는 사회가 바로 발전된 사회이고 선진국이 되는 길이다. 우리도 저소득층, 외국인노동자의 인권 등에 대한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진지한 고민과 반성, 그리고 사회적인 합의 문화가 발전된다면 세계의 어느 국가보다도 국제사회에서 강한 발언권을 갖게 될 것이며, 국제사회의 성원으로서 더 많은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사람간의 관계는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공정한 규범에 의해 유지되어야 한다. 이러한 공동의 규범을 만드는 과정은 모든 사회에서 다른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규범을 만들어 내는 토대는 인권에 대한 존중으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상호 인정할 수 있고, 정당한 규범을 만들기 위한 토대로서, 인간을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목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인권관의 확립을 통하여 외적인 모양만이 아니라 내적인 내용이 충실한 사회를 만들자. 이제는 내적인 발전을 통하여 안으로 윤택한 살기 좋은 공동체를 만들어갈 때라고 확신한다.
/신보영 경기도의회 의원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