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 살아진 제 셤길이란 다하여라 디나간 후면 애닯다 엇디하리 평생에 고텨 못할일이 잇뿐인가 하노라” 송강 정철의 훈민가처럼 지난 8일 혼자 목욕탕에 갔다가 지난날 부모님 생각에 눈물만 짓고 나왔다.
연천 비무장지역 시골에는 목욕탕 시설이 없는 집이 대부분이고 공중목욕탕은 이십리나 가야 하기 때문에 아버님은 겨울철이면 우리 집에 오셔서 목욕탕을 자주 가셨다. 아버님은 자식이 성장해서 커가는 모습이 대견한 듯 했고, 부모자식 지간에 살을 맞대고 등을 밀어주면서 부자(父子)지간에 따뜻하며 사려 깊은 사랑의 표현을 주고받았기에 나 또한 기분이 매우 좋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나의 아버님에 대한 작은 효심도 내 자식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아버님이 중학교에 들어간 손자녀석의 손을 잡고 목욕탕에 가시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직 나이가 어려서 아버님의 진의를 잘 모르는 손자녀석은 할아버지가 등을 아프게 밀어주신다고 푸념이다. 나는 목욕을 다녀온 후 투덜대는 아들의 손톱을 깎아 주면서 말없이 나무란다.
“이 녀석아 할아버지 등을 밀어 드리라고 했지 언제 할아버지한테 때밀이 서비스를 받으라고 했냐? 눈치 없는 녀석아!” 그래서 결국 3대가 함께 목욕탕에 가게 되었다. 아버님을 모시고 단 둘이 목욕을 가면 가슴이 뿌듯하고 보람이 있었는데 이제는 나의 기분이 달라졌다.
늙으신 아버님의 등을 밀어드리면서 점점 어깨가 좁아지고 등뼈가 앙상한 아버님의 야윈 등을 행여나 아파하실까봐 정성을 다해 조심스럽게 밀며 나의 이 작은 효도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으면 가슴이 메어진다.
자식의 성장을 지켜보며 약동하는 봄을 찬미하듯 먼 장래의 꿈을 심어보는 목욕이기에 우리 3대의 목욕은 뜻깊은 혈육의 정을 나누고 애정표현의 장이 되기 때문에 뜨거운 온탕 속에서도 우리 3대는 ‘물보다 더 진한사랑’을 느낄 수 있어서 목욕탕 가는 날을 기다리곤 했었다.
그런데 5년전 아버님께서 노환으로 돌아가시고 아들녀석은 군대에 입대한 후부터는 나혼자 목욕탕에 가서 남의 등을 밀수도 없고 나의 등을 밀어줄 사람도 없어 늘 개운치 못한 목욕이 싫어졌다. 그 후 조기축구회 회원들과 토요일날 여러 명이 어울려 목욕을 즐겨 왔다.
그런데 이번 ‘어버이날’은 조기축구장을 못나갔기 때문에 혼자 목욕탕에 갔는데 손자와 같이 목욕을 하는 친지가 “요녀석이 할아버지 등을 제법 잘 민다”는 자랑의 말을 듣고 울컥 돌아가신 아버님의 등을 밀던 생각이 나자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도망치듯 목욕탕을 나오고 말았다.
/조 수 기 경기북부 범죄피해자 지원센터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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