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너희들을 뭐라고 부르랴?
물결, 장미, 노을, 구름, 진주, 사랑, 너희들은 그 모두에 속해 있어서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무엇.
석학 김윤식 교수께서 문학연구를 통해 평생을 두고 찾고자 하신 ‘아득한 울림’ 쯤이면 비슷할까? 제자라는 이름으로는 너희들의 형해(形骸)만 드러낼 뿐이어서, 그 이름으로 너희들을 부르지는 않을게.
내 가슴 안에는 너희들의 방이 너희들 수 만큼 있단다.
료헤이의 ‘우동 한 그릇’에서, 북해정 주인이 해마다 섣달 그믐날 2번 테이블을 예약석으로 비워놓는 마음으로, 나는 방마다 문을 열어놓고 너희들을 기다린다. 너희들은 무시로 드나들고, 재잘대고, 장난치고, 사내 녀석들은 팔씨름도 하고.
너희들은 내가 제일 공들여 가르친 중세국어문법은 다 잊어버렸어도, 지나가듯 한 얘기인 장미의 달, 유월의 신부 얘기는 안 잊었다지? 그래서 너희들 방에는 너희들과 함께 누렸던 교정(校庭)의 라일락 향기와 등나무 그늘과 연못 속의 붕어, 민들레, 그런 것들만 가져다 놓았다.
너 철이, 청개구리 짓을 잘하더니, 부모님 뜻 어기고 고등학교 진학도 마다하더니, 지금은 중국에 가서 회사 대표한다며? 네 경험을 살려 모 대학원에 특강 강사로 출강한다는 얘기도 들었다. 네 방에는 네가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을 한 옆에 모아 놓았다.
병미가 제 방에 들어앉길래, 지금도 곱지? 물으니까 제가 예쁜 얼굴은 아니었잖아요, 예뻤지, 고등학교 1학년까지만 가르치고 떠났으니까, 그 나이에 알맞게 아기 솜털이 애잔하고 입매엔 어린양이 묻어있었잖아. 저 마흔둘이에요, 그러나 네 방에서 헤르만 헤세를 읽고 있는 너는 언제나 열일곱 살, 율곡 선생을 펴든 나는 스물 아홉이란다.
성우야, 네 방에는 김수영 시인의 시를 걸어놓았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만학으로 네 대학에서 나도 공부할 때 너는 벽보를 붙이다가 나를 보고 싱긋 웃고 절을 한 것 생각나니?
얼마 후 6·29 선언이 있었고 이 땅에 봄이 찾아왔었다. 너한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빚지고 있는지 너는 알려고도 하지 않을 거야.
주연아, 네가 네 방에 왔길래 주연아 하고 불렀더니, 선생님 제 이름이 송이엄만 줄 알았는데, 주연이네요. 선생님 자꾸 불러주세요. 넌 내 머리카락 한 가닥을 구해서 사진첩에 넣어놓고 들여다보곤 했다며? 마흔이 다 된 애가 이제야 그걸 고백하다니, 그 때 진작 알았으면 소월 아니면 영랑의 시집이라도 한 권 사주었을 텐데, 내 마음에 물결도 조금 일었을 테고, 너희들에게 주어서 아까운 게 있을까?
그런데 애들아, 내가 제일 아름답게 꾸며 놓은 방은 먼저 하늘나라로 간 선우 방이란다. 하늘나라에서 달에 물들고 별에 물들어 선우가 찾아오면, 눈가에 이슬방울이 맺혀 있어서, 그 방은 호수가 되고 강물이 되고, 우리가 멈추지 않는 바람이 아니니까, 언젠가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날 날이 있겠지.
아직도 내 가슴 안에는 너희들의 방을 더 만들 수 있는 공간이 무한대로 있어서, 오늘도 나는 너희들을 부른다.
애들아 모여라, 이제 종례할 시간.
오늘의 주제는 내 스승께서 그 분의 스승으로부터 넘겨받아 내게 전해 주신 그 말씀이다.
“마음에 정의의 횃불이 타오르게 하라. 가난한 이웃에게 해를 끼치는 자 있으면 그 불길로 살라버리고, 그 불길로 네 가난한 이웃을 따뜻하게 하라” 그러다가 고단하면 내 가슴에 있는 너희들의 방에 와서 쉬거라. <모두 가명임>모두>
/김 국 회 도교육청 교육정책과 장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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