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시론/커뮤니케이션 지수의 수준을 높여야

사회변화가 워낙 빠르다보니 각 부문에서 새로운 용어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지금은 CQ시대라는 것이다. 30~40년 전 우리 시대는 IQ시대였다. 아직도 그렇지만 잘 외우는 머리를 가진 사람이 우수한 사람으로 대접받는 제도들이 남아 있다. 사법고시며 수많은 시험들이 그런 유산이다. 미국에서처럼 일정한 자격을 거친 뒤 그 사람의 평판이 사회에서 걸러지며 판사로 임용되는 제도와 다른 것이다. 10~20여 년 전부터는 EQ라는 말이 도래했다. 감성이 사회 문화의 중심이 되어 있다. 정치도 보통 사람의 정서에 호소하고 광고며 영화, 드라마들이 감성 자극에 열을 올리고 있다. 미국의 영화나 영국의 소설도 우주전쟁이며 환타지풍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러한 이미지며 상징의 세계에서는 자칫 실상은 보이지 않고 허상만 보일 위험이 있다. 정작 앞으로의 시대는 어떠해야 할까. 바로 커뮤니케이션이 활성화 되는 CQ(Communication Quotient) 시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커뮤니케이션의 양은 늘었는데 쓸만한 내용은 없다는 게 우리 사회의 단면’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 사회를 계층별로 가르기도 하고 그 틈 사이로 경계인이 나타나기도 한다. 자칫 우리 사회가 감당할 양 이상의 정보들이 흘러넘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든다. 아무리 좋은 이상과 제도도 그 사회 구성원이 받아 들일만큼만 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년 전 언론사 주재원으로 일본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당시는 우리 사회가 일본에서 여러 정보를 구하던 때이다. 새로운 잡지 창간소식이며 문화행사, 판매기법, 광고 기법 등 배울 게 많았다. 그러나 아무리 새로운 자료를 구해 본사에 보내더라도 별 반응이 없었다. 문제는 담당자가 그 내용을 소화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나는 현장에 가서 보고 새 정보의 가치를 이해했지만 본사의 담당자가 어떻게 그 자료의 가치를 알 수 있단 말인가. 새 자료를 구하는 것보다 그 자료의 가치를 본사 담당자에게 설명하는 게 더 어려운 일임을 체험하게 되었다. 담당자가 납득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자료도 무용지물에 그치고 만다. 요즘같이 여행이 자유롭거나 이메일 혹은 동영상 메시지가 있었다면 문제가 쉽게 해결 됐을 지도 몰랐지만.

요즘 우리사회가 혼란해 보이는 것도 정부정책의 의도가 국민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해 일어나는 혼란이 아닐까.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나아가 정부와 국민 사이에 커뮤니케이션의 갭이 있는 게 사실이다. 가정 안에서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 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젊은이들은 소리말이 아닌 글말 문자 메시지를 더 즐긴다. 글말도 이모티콘을 사용한다. ‘안녕하세요’가 ‘꾸벅’이 되더니 이제는 ‘^*^’이나 ‘^-^’이 되었다.

우리 사회는 아이큐며 이큐의 혼재 속에 이제부터는 커뮤니케이션의 지수(CQ)를 높여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소통의 기초는 상대를 인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한류가 동남아에 흐르고 있지만 너무 일방적이다 보니 일본에서는 ‘혐한류’가, 중국에서는 ‘항한류’가 일고 있다. 모든 전문가는 상대방의 문화를 같이 받아들이고 아우르는 대안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통일문제를 둘러싼 강모 교수의 발언을 놓고도 언론은 언론자유며 사상·학문의 자유를 논하는 게 아니라 이념 갈등을 부추긴다. 이런 혼란이 자유로 보였는지 ‘국경없는 기자회’에서는 금년 우리나라를 아시아에서 제일 높이 일본보다 3단계 우위인 34위에 놓았다. 혼란할 정도로 자유롭다는 뜻인가?

사회적으로 대화의 필요성을 인식해 ‘끝장 토론’이라는 희귀한 방식도 만들어내는 나라다. 객관적 기초 위에 상대와의 차이를 찾아내는 알맹이 있는 커뮤니케이션 풍토로 커뮤니케이션 지수를 높이는 노력이 필요한 때이다.

/김 광 옥

수원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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