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모난 돌은 정을 맞아야 한다

출판기념회에 전시했던 작품을 남편이 거실 벽에 걸었다. 내가 보기엔 너무 높이 건듯하다. “역시 안목이 나보다 떨어져”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에 대해 다시 거론하지 않았다. 얼마 후 남편이 멀찌감치 떨어져 바라보면서 조금 아래로 고쳐 달기에 “처음에 단 위치는 글을 읽기에 편한 눈높이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러니 남편이 자신의 눈높이로는 처음 걸었던 높이가 좋았는데 천장과 아래로 놓인 장식물과의 간격이 어색하여 낮춘 것이라고 한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평소 남편과 너무 많이 다르다는 생각때문에 이처럼 간단한 이치까지도 판단하지 못한 것이다. 남편이 “내 키에는 더 높은 것이 편해”라고 부인할 수 없는 사실적인 설명을 하지 않았다면 끝까지 남편이 감각이 없어 잘못 걸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서로 다른 입장의 차이를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갓 살림을 차렸을 때, 청소를 하고 있는데 남편이 “기왕이면 구석구석 하라”고 말했다. “열심히 하고 있는데 격려해주지는 못할망정 핀잔을 준다”고 투덜거리자 남편이 걸레를 들고 냉장고 위를 닦으려고 한다. 그때서야 아차 싶었다. 의자를 가져가 올라가 보니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다. 민망스러웠다. 남편뿐만 아니라 우리집에 다녀갔던 키가 큰 손님들을 생각하니 망신스러웠다. 그동안 나는 작은 내 키에 맞춰 세상을 본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분명히 보고 있는데 나는 보지 못한 것이다. 내 눈높이로 보이는 세상이 전부인듯 살았다. 나보다 키가 큰 사람들이 내가 보지 못했던 먼지를 보며 나를 비웃고 있는 동안 난 깔끔하다고 자부까지 했을 것이다.

고도의 난시였던 친구의 말을 빌리자면 자신은 평평한 바닥이 울퉁불퉁하게 보여 발을 헛디딜 때도 많았고 빨래줄을 잡으려다 헛손질을 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고 한다. 세상을 바라 보는 관점도 성장 배경이나 환경 여건 등에 따라 달라지는데 설상가상 우리는 이상 시력인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한가지 현상을 굴절시키고 왜곡시켜 판단하게 된다. 머리로는 사람들이 나와 같지 않음을 분명하게 이해하면서 가슴은 나와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더욱이 나와 다른 것은 틀린 것이고 나와 같은 것이 옳은 일이라고 우긴다. 내 입장에서 바라 보는 게 전부이고 사실일 것처럼 고집했다. 얼마나 많은 경우, 내가 잘못 보고 있다고 알려 주는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탓하며 비웃었을지를 짐작한다.

지금까지 살며 남편과 그리고 이외의 사람들과 다툰 이유는 나만 맞았다는 어거지였고 상대가 틀렸다고 시인하게 해야 한다는 고집이었다. 멀리서 바라보는 사람은 참으로 우스웠을 것이다. 상대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내 말만 전달하려고 언성 높이는 모습은 “빨간 색이 가장 예쁜 색이야. 파랑색이 가장 예쁜 색이야”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마치 피라미드 모양을 밑바닥만 보고 각이 네개인 사각형이라도 우기고 삼각형은 피라미드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라고 고집하는 어리석음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란 속담을 재해석해 본다. 모난 돌은 정을 맞아야 쓰일 수 있다. 정을 잡은 손길이 힘줘 두들겨 줘야 댓돌으로라도 쓸 수 있게 된다. 지금까지 나의 잘못을 들키고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절대로 나 혼자 세상을 바로 볼 수는 없다. 근시인 내가 안경이나 렌즈의 도움으로 세상을 보듯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을 찾아 일깨워주는 정을 감수해야 한다. 모난 곳을 깨트려 주는 사람들의 아픈 두들김을 인내해야 한다. 정을 잡은 사람의 자격을 운운하거나 투박한 솜씨를 탓함은 졸렬한 회피요, 변명이다. 내 주변 사람들이 나를 포기하지 않도록 비명 소리를 들키지 않도록 해야겠다.

/유 정 옥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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