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3월 26일은 안중근의사가 순국한 지 96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서울 남산 안 의사 기념관에서 추념식이 있었다. 그 식에 참가하며 나라를 생각해보는 기회를 가져 보았다. 추념식은 여러 인사들의 그만그만한 추념사보다는 안숙선 명창의 ‘안중근열사가’가 깊은 감명을 주었다. 추념식에는 일본에서 안 의사를 숭모하는 사람들도 다수 참석하였다.
이 시대에 안 의사를 생각하는 것은 지금 우리 시대가 100여 년 전 열강의 침탈 시기와 유사한 상황이라는 가정에서이기도 하다. 다만 지금은 군사나 정치뿐만 아니라 세계화라는 이름 아래 경제적·문화적인 문제까지 얽혀 있어 한층 복잡한 상황이라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통일이라는 큰 목표 아래 아시아 동북 지역에 대한 역사 재인식이 필요한데 중국의 동북 공정정책에 따라 상대적으로 우리의 역사가 자꾸 지워지고 있다는 안타까움 때문이기도 하다.
중국의 동북공정 이래 중국 내 한국의 과거사 유적이며 일제시대 의병이나 의사들의 활약상을 기린 기념물들이 중국 안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다고 한다. 작년 8월 그 곳을 방문했을 때 조선 동포의 이야기를 듣자하니 용정의 윤동주 시비나 일송정 시비의 글씨가 돌에 갈려 없어져버렸다는 것이다. 더불어 중국정부는 외국인의 동상을 세우지 못하게 하고 있어서 그간 안중근 의사의 동상도 세우기 어려웠다고 한다. 다만 그곳 박영달 씨를 중심으로 한 조선동포들이 차선책으로 하얼빈에서 90여㎞ 떨어진 모얼산 앞 원보산능원 안 개인 땅에 안중근의 흉상을 모셔 놓았다.
특히 작년 8월에는 하얼빈에서 남북한 학자들이 다국어정보처리 세미나를 한 터여서 북의 대표들도 모얼산 참배에는 같이 참석한 바 있었다. 안중근 의사를 참배하는 데는 남북한이 따로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금년 1월 16일에 하얼빈 시내 개인 터에 안의사의 동상을 세우게 되어 하얼빈 지역 조선족 15만의 숙원 사업 하나를 이루게 되었다.
이 시대에 안 의사를 생각하는 것은 막연히 중국의 동북공정에 항의하는 것 이외에 우리의 역사를 복원해 내는 작업의 일환으로 안 의사가 마음에 와 닿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는 많은 침탈을 받아서인지 역사를 기억함에 사건과 왕조를 중심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도 인물을 통해 역사를 복원하는 방법에 유의할 때라 여겨진다. 그러나 아직은 텔레비전 드라마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안 의사에 대하여도 앞으로는 일본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당시의 우리나라 역사의 관점에서 그 전말을 연구할 필요를 느낀다.
안 의사는 1909년 하얼빈 역두에서 이등박문을 저격하고 여순재판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교수형을 당해 공동묘지에 매장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안중근어록을 음미해 보면 이 말들이 허구라는 걸 알 수 있다. 즉 안중근은 당시 대한의군 참모중장이었으므로 의사가 아닌 장군이며, 거사는 대한의 독립전쟁이나 하르빈전투로 바뀌어야 하고, 이등박문 저격은 이등박문사살처단으로, 여순재판은 불법재판으로, 사형언도는 일제의 살해지시로, 교수형은 살인행위로, 매장은 암매장으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안 장군은 사형집행 직전 10일 동안 ‘동양평화론’을 집필 중이었으나 급작한 집행으로 다 마치지 못했다. 안 장군은 첫째, 동북아 공동안보체제 형성과 국제평화군 창설 둘째. 동북아개발은행 설립과 공동화폐 발행 사업 추진을 주장했다. 오늘 우리 아시아가 추진하려는 사업을 이미 주창하신 바 있다.
중국의 대권주의와 일본의 군국화가 진행되는 이때 안 장군의 서거 96주년을 맞아 다시 그가 부르짖은 동북아를 중심한 ‘동양평화론’을 되새겨보아야 하지 않을까.
/김 광 옥
수원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