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어렸을 때 가족들로부터 별명을 받게 됐는데, 울보라는 별명이다. 울보라는 별명에서 알 수 있듯 평소 표현훈련이 잘되지 않는 탓인지 말로 표현해야 할 일들을 울음으로 대신 표현했던 것 같다. 필자는 이 별명을 혹처럼 안고 살면서 의식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열등감을 가리기 위해 될 수 있으면 남들처럼 표현을 잘하려고 애를 쓰기도 했고 말에 앞선 눈물을 참으려고 노력했었다.
그러나 평생에 풀지 못한 과제가 아닌 은총의 선물이었음을 깨닫게 됐다. 울보라는 별명, 별로 부끄러워 할 게 없다는 사실을 어느날 어린 나이 때 교회 목사님의 설교 가운데 발견하게 됐다. 하나님 앞에서 잘 우는 사람일수록 스트레스가 빨리 회복되고 위궤양이나 잔병에 걸릴 확률이 낮다는 것이다. 심령이 답답하고 가슴에 상처를 안고 있을 때, 하나님 앞에서 몸부림치며 울고 나면 마음이 탁 트이고 하늘의 위로가 심령 가운데 함께함을 체험한다.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눈물을 흘리며 우는 일은 종종 있다. 남자와 여자의 슬픈 사랑의 영화나 연속극 등을 보면서 울 수도 있다. 때로는 남이 미워 울 수도 있고 최루탄 가스나 양파 껍질을 벗기면서도 눈물을 흘리며 울 수 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런 류의 눈물에는 인체의 생화학 작용 자체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이다. 방황하는 자신의 영혼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서 몸부림치며 흘리는 눈물에는 고단위 단백질이 눈물 속에 섞여 함께 흐를뿐만 아니라 인체와 영혼의 폐기물들을 깨끗이 씻겨 내는 역할을 감당하므로 자연스럽게 육신과 영혼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한방울의 눈물 속에는 하늘의 신비가 들어 있다. 필자는 교회 강단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무릎에 담긴 눈물의 기도와 애통 속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신비를 수없이 체험할 때마다 기쁨과 축복 등이 삶을 적셔주고 감싸줌을 고백하게 된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자녀들을 위해 드리는 눈물의 기도나 이웃과 나라를 위한 눈물의 기도들은 우리의 영혼을 풍족하게 적셔 준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어진 무엇하나라도 버릴 게 없고 불필요한 게 없다는데 사람에게 주어진 별명도 하나님 안에선 축복의 여건이 돼 감사할뿐이다.
지금 기독교에선 사순절 고난주간을 맞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 눈물을 흘리며 함께 고난에 동참하는 거룩한 한 주간을 보내고 있다. 아울러 더 큰 소망과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죽음에서 살아나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부활할 것을!
/권 영 삼 수원영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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