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전반적으로 기쁘고 즐거운 소식보다 안타깝고 불유쾌한 소식들이 넘쳐난다. 정치는 제자리를 잡지 못해 정쟁과 이합집산을 거듭하고 학계나 법조계 등 그나마 우리 사회의 정신적 버팀목이 돼야 할 지성인 집단의 모럴 헤저드는 더 이상 그들에게 기대할 게 없을 지경이다. 서민경제는 끝 모를 나락으로 떨어져 고통의 신음소리조차 아스라한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장마 끝 수해는 그들의 깊은 삶의 질곡을 한번 더 할퀴고 지나갔다. 간혹 마음의 위안이라도 삼을 훈훈한 인정거리나 잠시라도 시름을 잊고 웃을 수 있는 상큼한 뉴스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비리·폭력·재난 등 나쁜 뉴스가 대부분이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대부분의 소시민들에게 이런 나쁜 뉴스들은 신문지면이나 TV화면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일뿐, 일상의 삶은 소소한 일들로 알콩달콩 지지고 볶고 산다. 그런데 뉴스를 통해 보이는 세상은 전쟁과 폭력, 대립과 갈등, 거짓과 일탈 등의 종합선물세트이다. 그리고 이 모든 뉴스들을 전하는 매체는 소위 언론이다. 언론이 굿 뉴스보다 배드(Bad) 뉴스에 더 많이 관심을 보이는 건 나름의 명분이 있다. 사회의 잘못되고 어두운 곳을 드러내 비판하고 해결과 치유책 등을 제시하는 건 언론의 첫번째 사명이자 역할이기 때문이다. 언론의 이러한 본성은 그것이 공공의 이익과 보도의 공정성을 담보하고 있을 때 바람직하고 권장돼야 할 기능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언론의 모습은 그러한 사명과 역할, 기능 등에 얼마나 충실한지 의문이다. 언론들은 사회 곳곳 사건이나 사고들을 쉴 새 없이 보도하면서 속보경쟁을 벌이고 시청자들이나 독자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기 위해 센세이셔널리즘의 마약에 도취돼 있다. 그리하여 긴 호흡으로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굿 뉴스보다 짧은 호흡의 자극적이고 말초신경적인 배드 뉴스들이 언론의 우선적 보도대상이 된다.
칭찬을 먹고 자란 아이는 칭찬할 줄 아는 성인이 되고 꾸짖음만 먹고 자란 아이는 세상을 부정하고 복수하려 한다. 무분별한 칭찬의 폐해와 비판적 지성에 대한 합리적 판단을 전제로 한다면, 언론이 작은 아름다움을 실천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칭찬해주는 굿 뉴스에 좀 더 많은 지면과 보도시간을 할애하는 것도, 지금의 답답함과 어려움을 이겨내는 한 방법이 될 것이다. 언론이 굿 뉴스에 지금보다 10%만 더 눈을 돌려보면 어떨까. 무더위를 식혀주는 건 반드시 에어컨이나 납량영화만이 아니라 상쾌하고 아름다운 굿 뉴스일 수 있다.
/이정진 오산대 이벤트연출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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