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모습은 성인용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이런 세상에서 요즘 아이들이 어른들의 잣대에 맞게 살려고 노력하면서 성인 천국에서 찌들어 가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안쓰럽기 그지없다.
아이들이 사는 세상을 잠깐 들여다보자. 길을 걸을 때 우리 아이들 키처럼 무릎을 구부려 낮추어 보라. 그러면 옆에 서 있는 건물들이 마치 달려들 것 같은 큰 공룡처럼 무섭게 느껴진다. 쌩쌩 지나가는 차가 내는 경적소리와 엔진 소리는 작고 앙증맞은 우리 애들 귀에는 호랑이처럼 으르렁 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야생 동물은 보고 듣는 것이 여느 때와 다르면 우선 도망갈 준비를 하거나 아예 냅다 뛰고 본다. 그래야지 잡아먹히질 않기 때문이다.
요즘 세상은 보고 듣는 것이 너무 많다. 이렇게 보고 듣는 것이 많아질수록 웬지 모를 두려움이 생겨나서 야생 동물처럼 나도 모르게 도망가고 싶게 된다. 컴퓨터와 텔레비전과 같은 시청각 매체는 뇌의 자극을 통해 일시적으로 몸의 지각을 잃어버리게 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 자극이 끝나고 나면 몸이 느끼는 불안과 공포가 더욱 증폭되어 나를 괴롭힌다.
지금 우리 아이들은 과다한 시청각 매체에 의해 정서적으로 불안해지고 이것으로 말미암은 사회적 일탈에 내몰리고 있는 것 같다. 예전에는 아이들의 놀이라는 게 고작 딱지치기, 고무줄놀이, 구슬치기, 팽이놀이 등이다. 대개 이런 놀이들은 직접 만지고 움직이면서 놀 수 있고, 어른들과 상관없이 아이들만의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사는 환경이 늘 보아왔던 익숙한 들풀과 집이고 늘 들어왔던 바람소리, 새소리, 물소리와 같이 일상의 밋밋한 맛을 주는, 어찌 보면 다정한 것들이다.
예전과 같이 몸으로 부대끼며 살 때는 고달프긴 해도 훈훈한 느낌이 있었지만 보고 듣는 게 많은 요즘은 자꾸만 불안해 진다. 왜 그럴까? 그것은 아마도 우리 몸으로 느끼는 촉각은 몸에 접촉되는 즉시 사라지는 과거형이고 보고 듣는 시청각은 아직은 내 몸에 다가오지 않는 미래형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나온 과거는 좋건 싫건 이미 경험한 것이라 쉽게 잊어버리기도 하며 교훈으로 떠올릴 수도 있지만 다가올 미래는 미지의 세상이라서 예측하며 불안하게 그려나가기만 하므로 어른처럼 이성적이지 않으면 참으로 견디기 힘들다. 철학자 화이트헤드가 ‘이성은 새로움을 강조하는 기관’이라고 말했듯이 새로움에 불안하지 않고 적응하려면 이성의 발달이 반드시 선행해야 한다. 하지만 이성의 발달이 미숙한 우리 아이들은 컴퓨터, 텔레비전, 게임기를 보고 들으면서 불안한 세상을 조심조심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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