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는 제리코가 그린 ‘메두사호의 뗏목’이 있다. 거대한 모래톱에 걸려 좌초한 대군함 메두사호에서 인육을 먹으며 살아 남은 사람들의 절망과 비탄이 그림 가득히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그 곳에는 절망만 그려져 있지 않았다. 아득한 수평선 너머 구조선이 점처럼 떠오르면서 그를 향해 힘껏 희망을 외치는 사람들의 몸짓은 절망보다 더 강렬했다.
절망의 또 다른 이름이 희망이라고 했는가?
최근 서민들 사이에서 ‘개천에서 용 난다’던 속담은 ‘개천에서 용쓴다’로 바뀌고 있다.
이제 더 이상 교육이 사회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장치는 아니다. 오히려 계층을 고착화 하는 기제가 교육인 우울한 현실이 각종 통계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대학등록금 1천만원 시대에 서민의 등골을 휘게 하는 사교육비는 1인당 64만원에 이른다. 공교육은 학급당 학생수 40명을 넘나들지만, 경기도는 초호화판 영어마을을 짓고 불과 3년 사이에 240억여원의 운영적자를 냈다. 경기도가 학교를 지을 때 내야 하는 법정부담금인 학교용지매입비는 제대로 지급하지도 않은 채 전시성과 선심성 업적을 위해 영어마을에 2천억원을 쏟아 부은 것은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북유럽의 핀란드는 학부모 사교육비 부담이 거의 없고 대학 등록금은 90% 정도를 정부가 지원하며, 학생간의 심한 경쟁과 점수를 유발하는 체제가 없어도 학업성취도와 교육만족도가 세계에서 가장 높다고 한다.
이 같은 교육복지 모델을 한국사회에서 만들고 국민 모두가 고통스러워 하는 교육비 부담과 살인적인 입시경쟁을 벗어날 수는 없을까. 정치인 그들만의 게임인 대선에서 교육의 희망은 찾을 수 있을까?
사립학교의 투명성과 공공성을 위한 최소한의 장치인 사립학교법마저 정치인들의 야합에 의해 족벌과 세습을 묵인하고 개방형 이사제를 무력화시키는 것으로 개악되었다. 비정규직을 보호한다던 법안은 대량 해고의 칼날이 되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거리로 내몰고 있다.
희망을 갖게 하고 희망을 품은 사람들을 철저히 배신하는 시대. ‘모든 시내가 바다를 배우는 까닭은 바다가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다를 배우기 위해, 가장 낮은 곳의 바다로 가서 절망의 끝자락을 딛고 일어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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