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시대에서 맞이하는 독서의 계절

김기봉 경기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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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깊어 감에 따라 단풍의 고운 빛깔은 절정에 다다르고 있다. 고운 단풍 잔치는 우리에게 만남이 아니라 헤어짐을 위한 의례다. 부처님 말씀처럼 태어난 것은 반드시 죽고, 온 것은 반드시 가는 것이 순리다. 이런 순리가 눈앞에 펼쳐지는 가을은 인간에게 사색의 계절이다.

인간은 책을 통해 사색하고 사색을 통해 책을 만드는 존재다. 만물 가운데 유일하게 인간만이 책을 읽고 쓰는 존재다. 책이란 지식과 정보의 보고(寶庫)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이전 시대와 다른 장소에 살았고 또 살고 있는 사람들과 지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매체가 책이고, 이 책 덕택에 인간은 문명의 발달을 이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디지털 환경 지식기반 사회로 이행하면서 아날로그 시대의 산물인 책은 더 이상 지식과 정보의 보고로서의 지위를 상실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유명한 말을 한 마샬 맥루한은 미디어를 ‘핫(Hot) 미디어’와 ‘쿨(Cool) 미디어’로 나눴다. 자료와 정보를 미디어 자체 내에 충족하고 있는 높은 정세도를 가진 인쇄물이 ‘핫 미디어’라면, 적은 양의 정보만을 제공하는 낮은 정세도를 가진 TV는 ‘쿨 미디어’다. 책을 읽기 위해선 그 개념적 의미를 능동적으로 이해하려는 시간과 노력이 요구된다. 이에 반해 영상매체에 의한 메시지 전달은 직접적인 감각을 매개로 수동적으로 이뤄짐으로써 시간과 노력 등이 절약된다. 이같은 경제성의 차이로부터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책이나 신문보다는 TV나 인터넷 등을 통해 지식과 정보를 습득한다.

디지털 시대 문자매체에서 영상매체로의 이행이 일어남으로써 독서의 계절로서 가을의 이미지는 퇴색하고, 낡은 시대의 풍속도로 여겨진다. 반도체 집적도가 1년6개월에 2배씩 증가한다는 ‘무어의 법칙’보다 더 빠르게 1년에 2배씩 증가하는 ‘황의 법칙’이 어김없이 현실화되는 시대에서 인간은 세상의 변화를 선도하기보다는 뒤따라가기에 바쁘다.

하지만 책이 아니라 인터넷을 통해 훨씬 더 많은 정보를 손쉽게 얻을 있게 된 우리는 이전 시대 사람들보다 더 지혜롭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가? 영상매체 기호들은 제한된 공간과 시간에서 단편적인 정보를 전달하고 또 그것을 순간적으로 파악하지 못하면 놓치고 마는 한계를 갖지만, 책은 반복적이면서도 반성적으로 해석됨으로써 깊은 차원의 지식을 전달할 수 있는 장점을 갖는다.

정보의 바다를 헤매야 하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더 많은 정보를 소비하는 능력보다는 양질의 정보를 찾아 내 것으로 소화하는 생산적 소비, 곧 앨빈 토플러가 말하는 ‘프로슈밍(Prosuming)’ 할 수 있는 소양이다. 이런 소양은 ‘쿨 미디어’인 영상매체가 아니라 ‘핫 미디어’인 책을 통해 배양될 수 있다. 성경 말씀처럼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인간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과 같은 정말 중요한 문제는 변한 것이 없다.

지난달 31일부터 2일까지 출판도시문화재단 주최로 제2회 파주북시티 국제출판포럼 2007이 ‘아시아 출판의 재발견-문학·역사 콘텐츠와 글로벌 출판’을 주제로 열렸다. 세계화시대 아시아 출판시장은 지식의 디지털화와 전지구화라는 이중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아시아적 가치’를 토대로 아시아출판공동체를 구축하지 않으면 아시아 출판시장의 미래는 없다는 위기의식이 이같은 행사를 열게 만들었다. 경기도에 있는 출판도시 파주가 아시아출판공동체의 메카가 돼 가을을 다시 독서의 계절로 부활시키길 기대한다.

김기봉 경기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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